2025. 9. 3. 11:19ㆍ캐나다 출신 외국변호사의 한국적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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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출신 외국 변호사의 한국 적응기
- Ep 9. 한국 사람들은 왜 그럴까? 빨리빨리!
한국을 대표하는 말 중 하나는 단연 ‘빨리빨리’다. 음식도 빨리, 배송도 빨리, 지하철 역사 안에서도 모두가 서둘러 걷는다. 그런데 이 속도는 단순한 생활 리듬을 넘어, 타인과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특히 도로 위에서 그 특징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 횡단보도에서 시작된 문화 충격
2023년 8월,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사방에서 반가운 모국어가 쏟아졌다. ‘아, 드디어 한국이구나’ 싶은 순간,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한 건 정면으로 돌진해 오는 택시들이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눈앞을 가르며 다가올 때, 하루 전 밴쿠버 거리에서 내 앞에 조용히 멈춰주던 운전자의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곳에선 차가 멀찍이서 속도를 줄였고, 나는 뛰지 않아도 여유롭게 길을 건널 수 있었다.
“여긴 한국이지.” 무심코 중얼거리며 초록불을 기다렸다. 하지만 파란불이 켜져도 마음은 놓이지 않았다. 쌩쌩 달려오는 차들이 정말 멈춰줄까,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행자 우선’이라는 문구가 있어도, 도로 위에서 진짜 우선은 언제나 차량이었다.
캐나다에선 조금만 멀리 있어도 차가 먼저 멈추며 “먼저 가시죠.”라 손짓했다. 반면 서울에서는 ‘보행자 우선’ 표시 위에서도 차를 피해 잰걸음을 치게 된다.
두 나라의 교통 문화는 도대체 왜 이렇게 다를까? 이 궁금증에서 오늘의 이야기가 출발한다.
▶ 배려가 습관인 사회 vs 배려가 희생이 되는 사회
밴쿠버에 살 땐 길을 건널 때마다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곤 했다. 아직 멀리 있는데도 차가 먼저 멈춰 기다려줬기 때문이다. 급히 뛰지 않아도,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보행자의 삶. 처음엔 그 호의가 어색했지만, 곧 익숙해졌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오자, 그 어색함은 곧 그리움이 되었다. ‘보행자 우선’이라 또렷이 적힌 도로 위에서도, 차량은 무심히 내 앞을 지나갔다. 때로는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더 내기도 했다. 내가 먼저 피해야 사고를 피할 수 있는 이상한 ‘우선’의 질서 속에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차선이 많은 횡단보도 앞에 설 때마다 같은 생각을 한다.
‘살아서 건너자.’
차가 멈춰 주길 기대하기보단, 그냥 먼저 피하는 게 안전한 나라. 그게 지금 내가 체감하는 ‘빨리빨리’ 문화의 민낯이다.
캐나다에선 보행자가 발만 디뎌도 차는 미리 속도를 줄이고 정지선 앞에서 기다린다. 빨리 건너라는 경적 소리도 없다. 오히려 ’천천히 가도 괜찮아요.’라는 운전자의 미소가 따라온다. ‘보행자 우선’이 단순한 법적 문구가 아니라 사회가 함께 약속한 태도라는 점에서 차이는 분명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캐나다의 삶은 모든 것이 ‘배려’였구나 싶다. 그리고 그 배려가 ‘습관’으로 몸에 밴 사회와, 그 배려가 ‘희생’처럼 여겨지는 사회의 간극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건 단순한 운전 문화의 차이일까? 아니면 더 깊은 '시민의식'의 문제일까?
▶ 깜빡이 하나에도 문화가 갈린다
캐나다에서는 깜빡이를 켜면 거의 100% 양보가 따라온다. 초보 운전 표시인 ‘N(NEW)’만 붙여도 도로가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진다. 차들이 자연스럽게 간격을 벌리며 “먼저 가세요. 안전이 우선입니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반면 한국에선 깜빡이를 켜는 순간 옆 차선의 차가 속도를 올린다. 들어오려는 차는 ‘막아야 할 대상’이 되고, 양보하는 차는 ‘호구’가 된다. 먼저 가라는 손짓은 때로 ‘지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깜빡이는 경쟁심을 자극하고, 실제로 더 속도를 내는 차들도 자주 마주하게 된다. ‘틈만 보이면 끼어든다’는 인식 탓에, 운전 중 감정도 쉽게 날카로워진다.
▶ 경적은 ‘경고’일까, ‘감정 표현’일까
캐나다에선 양보가 기본값이라, 감정이 격해질 일도 드물다. 경적 소리도 마찬가지로 드물다.
20년간 캐나다에 살면서 경적 소리를 들은 건 손에 꼽을 정도다. 그곳에서 경적은 정말 위험할 때만 울린다. 예컨대, 앞에 사슴이 튀어나올 때처럼.
하지만 서울의 출근길은 다르다. 조금만 느려도, 망설여도 경적이 울린다. 그 소리는 단순한 경고음을 넘어, 분노와 재촉이 뒤섞인 감정의 표현처럼 들린다. 그 소리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든다.
▶ 시민의식은 어디서 오는가
제도와 문화 모두, 캐나다는 ‘보행자 우선’이 자연스럽게 체화된 사회다. 법규, 보험료, 사회적 시선 모두가 보행자 편이기에 운전자가 멈추는 것이 가장 싸고 안전한 선택이 된다. 질서를 지키는 건 공동체에 대한 예의이자, 자신에 대한 존중이다.
반면 한국은 도로에 ‘보행자 우선’이라 적혀 있어도, 실제 골목길에선 차량이 우선인 경우가 많다. 정지선과 과태료 규정은 있지만, 그것이 습관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걸까?
밀집된 도시 구조, 교통 인프라, 교육 방식, 경쟁 중심의 사회 분위기…
그 어떤 하나 때문이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건, ‘빨리빨리’가 오랫동안 우리의 미덕처럼 여겨져 왔다는 사실이다. 속도가 미덕이 되고 효율이 배려를 덮는 순간, 우리는 더 자주 다투고 더 자주 경적을 울리며, 결국 서로를 불신하게 된다.

▶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변하고 있다. 보행자 우선 캠페인이 늘고, 어린이 보호구역의 과태료가 강화됐으며 경적 소리에 민감한 MZ세대는 양보 운전을 ‘쿨한 매너’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지만,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은 분명히 배려다. 무엇보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 “왜 우리는 이럴까?”라고 묻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 배려 없는 속도는 결국 사회적 비용이 된다
시민의식이란 건, 거창한 교육이나 정책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횡단보도 앞에서 잠시 멈추는 습관, 깜빡이를 켰을 때 한 번쯤 비켜주는 마음, 보행자가 길을 다 건널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여유. 그런 사소한 행동들이 쌓여 시민의식을 만든다.
빠름은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움직여 온 중요한 동력이었다. 효율을 높이고, 성장을 이끌었지만 배려 없는 속도는 결국 사회적 비용으로 돌아온다. 빠르고 효율적인 것도 좋지만, 때로는 ‘조금 느리지만 서로를 배려하는 길’이 더 멀리 간다.
시민의식은 법보다 오래가는 습관이고, 서로를 사람답게 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어딘가의 교차로에서는 경적 소리가 울리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도 ‘깜빡이만 켜면 갈라지는 도로’의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시민의식은 결국 깜빡이를 켰을 때 속도를 줄여주는 것,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주는 자동차, 스쿨존이나 노인보호구역에서 자연스럽게 서행하는 운전처럼 평범한 일상 속에 스며든 배려의 마음이다. 나는 언젠가 한국에서도 그런 장면들이 낯설지 않은 날이 오길 바란다. 그때가 되면 ‘배려’라는 단어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건 어느새 우리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너무도 당연한 풍경이 되어 있을 테니까.
EP. 10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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