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9. 17. 11:31ㆍ법정보다 오피스: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변호사들의 진짜 세상사는 이야기 '변호사 커뮤니티' '로글로그' 입니다.
법정보다 오피스 :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 Ep 13. 숫자에 담기지 않는 가치에 대하여.
연초 회사에는 어김없이 ‘목표 설정(KPI, OKR, MBO 등)’ 시즌이 찾아옵니다. 새로운 회계 연도가 시작되면 회사는 변함없이 사업 목표를 설정하고, 부서별로 세부 목표를 정리해 나가게 됩니다.
회사원이라면 ‘성과’라는 두 글자를 가볍게 웃어넘기기 어렵습니다. 수치로 환산된 목표는 곧 평가와 직결되고, 평가는 승진과 보상으로 이어지니까요. 그래서 목표 설정은 회사원들에게 늘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사내변호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하지만 매번 목표 설정 시즌을 맞을 때마다 같은 고민이 고개를 듭니다.
‘변호사의 일은 과연 숫자로 명확히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
로펌에서처럼 사건당 매출을 따지는 구조도 아니고, 그렇다고 매월 처리 건수나 작성한 계약서 숫자로 단순화할 수도 없습니다. 각 사건에 투입하는 노력이 일률적이지도 않으니까요.
조금 예전 칼럼이기는 하지만, 대한변호사협회에서 발행하는 <법조신문>에 “[사내변호사 길라잡이]관심법을 허하라!”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링크 연결). 정웅섭 변호사님의 칼럼이었는데, 요약하자면, ‘사내변호사의 업무 성과를 측정하는 완벽한 기준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을 더하자면, 상황은 여전하다고 생각합니다.
로펌에서는 명시적인 성과 지표를 설정하지는 않았습니다(제가 경험한 곳만 그럴 수도 있어요😅). 거기서는 모든 변호사가 매출을 일으켜야 하는 존재였으니까요. 소송이든 자문이든, 로펌은 변호사가 생산 주체이지요. KPI 같은 성과 지표를 설정하지 않아도, 결국 '얼마를 벌었는가'라는 숫자가 곧 성과를 말해주는 구조였습니다. 일의 성격상, 돈이라는 객관적 기준이 매일매일 가시화되는 것입니다.
반면, 사내변호사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 놓입니다. 사내에서는 매출을 직접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줄이고, 문제를 예방하고, 비즈니스가 매끄럽게 돌아가도록 뒤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성과임에도, 정작 그것은 수치로 환산하기 어렵습니다. 사고가 나지 않는 것도, 규제가 걸리지 않는 것도, 모두 '없는 일'이니까요.
그렇다 보니 성과 지표를 설정할 때마다 묘한 고민에 빠집니다. "법적 검토 몇 건 완료"라든지, "계약서 검토 평균 회신일 단축" 같은 지표를 만들어 보기도 하지만, 이 숫자가 진짜 우리의 가치를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스스로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숫자로 드러나지 않는 법적 리스크의 선제적 관리, 이해관계 조율, 그리고 조직이 넘어질 수 있는 순간마다 보이지 않게 버텨 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은 성공할수록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남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내변호사의 성과는 오히려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성과는 성과 지표의 표면 너머, 회사의 긴 시간 속에 조용히 쌓여갑니다.
사내변호사는 업무의 특성상 때때로 사내에서 ‘레드팀’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고를 막기 위해 위험을 지적하고, 규제 리스크를 대비하며, 때로는 추진 중인 프로젝트에 제동을 걸기도 합니다. 더 늦기 전에 미리 살피고 조심하자고 권하지만, 그런 말들은 간혹 "괜히 겁을 준다.", "일을 복잡하게 만든다."는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문제를 예방하려는 노력은 당장 눈에 띄는 성과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사내에서는 가끔 애매한 위치에 서게 됩니다. 조심하자고 할 때에는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고, 정작 사건이 터지면 "왜 미리 막지 못했냐."는 질타를 받기도 합니다.
앞서서 경고할 때에는 환영받지 못하고, 일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호출되는 자리. 사내변호사의 위치는 그렇게 늘 긴장과 애매함 사이를 오갑니다.
성과 지표를 입력하다 보면, 이런 순간 때문에 문득 허탈함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열심히 대비한 흔적들은 조용히 사라지고, 예방에 성공했더라도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실패는 크게 드러나지만, 성공은 조용히 지나가는 구조. 이 속에서 우리의 성과는 다시 ‘없는 일’이라는 이름으로 묻히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 기울여야 하는 조심스러운 노력 덕분에, 수많은 위험이 현실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이런 조용한 역할이야말로, 진짜 조직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된다는 것도 말이지요.
이런 상황을 반복하다 보면, 사내변호사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자세를 익히게 됩니다. 바로 일희일비하지 않는 마음가짐입니다(성과에 연연하지 않는 마음이지요).
칭찬을 듣는 날에도, 질책을 받는 날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 성과 지표에 기록될 수 없는 수많은 노력이 소리 없이 쌓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믿는 것. 이런 자세가 없다면, 사내에서 변호사로 오래 버티기는 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다행히도, 시간은 배신하지 않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순간순간의 노력이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조직 안에서도 작은 변화가 생깁니다. 미묘하게 달라진 시선, 조금 더 일찍 찾아오는 상담 요청, 조심스럽게 건네는 감사의 말. 비록 거창한 포상이나 눈부신 성과는 아닐지라도, 그런 작은 변화들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지난 에피소드에서 소개드린 것처럼 동료들로부터 조용한 ‘엄지척’을 받는다거나(Ep. 11 참고), 간접적으로 좋은 칭찬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 프로젝트에서 법적 쟁점이 될 수 있는 규제 사항을 사전에 정리해 전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규제는 꽤 치명적인 문제였고, 결국 해당 프로젝트는 전면적으로 수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관련 인원들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지지 않을까 우려도 있었지만, 며칠 뒤 다른 동료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팀에서 이 변호사 덕분에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다고 하더라. 나중에 자문받을 일 있으면 꼭 다시 이 변호사에게 연락하겠다던데.”

이런 간접적인 칭찬은 생각보다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누군가에게 바로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것도 힘이 되지만, 돌아 돌아 전해지는 긍정적인 평가에는 또 다른 울림이 있더라고요. 직접 드러나지 않지만, 내가 잘하고 있다는 조용한 증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리스크를 읽어내고, 판단을 내리고, 때로는 고독하게 조심을 외치는 가운데, 나 스스로가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그리고 이 성장은, 어떤 수치나 지표에도 다 담을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 되어 줍니다.
성과 지표는 조직이 필요로 하는 하나의 기준입니다. 성과를 정리하고 평가하는 데에는 수치가 편리합니다. 하지만 숫자에 담을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특히 사내변호사의 일은, 사건이 없게 하는 것, 위험을 줄이는 것, 갈등을 예방하는 것처럼, 숫자가 아니라 '없음'으로 증명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성과 지표에 적히지 않는 시간들, 보이지 않는 고민들, 실패를 막기 위해 조심스럽게 쌓아 올린 선택들이야말로, 우리가 진짜 이룬 성과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회사의 명령에 굴복하여 성과 지표를 입력하며…😂).
성과 지표는 우리가 가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일 수는 있지만, 그 길의 모든 의미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요.
오늘도 조용히, 묵묵히. 숫자 너머의 가치를 쌓아갑니다.
그리고 언젠가, 조용한 노력이 결국 나와 조직의 뿌리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품고, 다시 하루를 시작합니다.
Ep 14.에서 계속.......
'법정보다 오피스: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법정보다 오피스 :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 Ep 15. 보고서를 쓰다 문득 떠오른 말에 관하여 by 이현욱 (1) | 2025.10.20 |
|---|---|
| 법정보다 오피스 :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 Ep 14. 나라에서 허락한 유일한 자랑거리, 간식 예찬 by 이현욱 (0) | 2025.10.08 |
| 법정보다 오피스 :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 Ep 12. 틈새를 찾습니다. by 이현욱 (4) | 2025.08.20 |
| 법정보다 오피스 :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 Ep 11. 엄지척 하나면 힘이 납니다. by 이현욱 (3) | 2025.07.16 |
| 법정보다 오피스 :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 Ep 10. 사내변호사를 준비하는 당신을 위한 작은 조언 by 이현욱 (2) | 2025.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