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 26. 13:26ㆍ법정보다 오피스: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변호사들의 진짜 세상사는 이야기 '변호사 커뮤니티' '로글로그' 입니다.
법정보다 오피스 :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 Ep 16. AI 시대, 인간의 '수' 를 찾는 길
2024년, 로글로그 연재를 처음 시작할 무렵, 이미 세상은 AI 열풍으로 들썩이고 있었습니다. 그때도 알고 있었죠. ‘글쓰기’라는 행위는 이미 생성형 AI가 따라잡았다는 것을. 어디에도 명시적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저는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스스로에게 한 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AI가 만들어 낼 수 없는, ‘진짜 경험’만을 쓰자.
이 다짐 덕분에 원고를 쓸 때마다 ‘이 이야기가 누군가의 개인 정보에 저촉되지는 않을까?’, ‘이 에피소드가 누군가에게 불편을 끼치지는 않을까?’ 같은 고민이 따라붙습니다. 실제로 진짜 경험만으로 글을 쓰겠다는 원칙은, 글감의 폭을 좁히는 가장 큰 난관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경험’의 약속은 어찌어찌 지켜내고 있습니다.

AI 기술에 대한 관심이 많은 편이라, 관련된 책이 나오면 꾸준히 찾아 읽습니다. 대부분의 책은 기술의 진보를 찬양하고, AI 기술이 얼마나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실용적인 도구 소개도 빠지지 않지요. 이런 책들을 읽고 나면, 세상 변화에 뒤처져가는 기분에 휩싸이곤 합니다.
그렇게 뒤처지기 싫은 마음에, 저도 일상 업무에 다양한 AI 서비스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판례 리서치 부분에서는 정말 큰 도움을 받고 있고, 로글로그 원고를 쓸 때에도 AI의 도움을 받습니다. 다만, 글을 ‘대신’ 쓰게 하지는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 AI는 저의 ‘진짜 경험’을 알지 못하니까요. 오히려 그 경험을 글로 만들기 위해선, AI에게 원고에 준하는 분량의 정보를 먼저 써줘야 하거든요(또, AI가 만들어내는 스타일은 묘하게 맘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로 아이데이션과 자료 검색 용도로 AI를 활용합니다.
예컨대 이번 원고에서는, 알파고의 수를 실제로 바둑판에 옮겼던 ‘아자 황’ 박사에 대한 정보를 찾거나, 어릴 적 읽었던 만화 <히카루의 바둑(고스트 바둑왕)>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는 데 AI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물론 AI가 만들어낸 정보에는 환각 현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따로 검토해야 하지요.
아무튼, 언젠가는 로글로그의 원고에도 AI에 관한 에피소드를 쓰고 싶었는데, 마침 좋은 계기가 생겼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장강명 작가가 AI와 관련된 신간을 냈거든요. <먼저 온 미래>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지금껏 읽었던 어떤 AI 서적과도 결이 달랐습니다. 그 점을 소개하면서, AI 시대에 대한 단상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 이후, ‘바둑계’라는 산업군은 사회 어느 분야보다 먼저 AI 침투의 충격을 경험하였습니다. 이 책에서 작가는 ‘먼저 미래를 맞이한’ 바둑계를 직접 취재하며, 그 안에서 무너지는 가치와 흔들리는 권위의 현장을 담담히 그려냅니다. AI 기술이 인간의 인식과 역할을 어떻게 재편해 가는지를 바둑 기사들의 진솔한 목소리를 통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지점은, AI가 전문가의 권위를 어떻게 무너뜨리는지에 대한 묘사였습니다. 과거 바둑 최고수의 대결에 대해서는, 관객들이 그 수의 의미를 명확하게 풀어낼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경기를 해설하는 최정상급 바둑 기사조차 말입니다. 그들의 바둑은 말 그대로 신선들의 놀음이었지요. 그런데, AI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AI가 ‘승률 00%’라는 명쾌한 숫자를 제시합니다. 해설자와 팬들 모두, 바둑 기사가 낸 수가 승률 몇%짜리 인지에만 관심을 둡니다. 작가는 “바둑 중계는 인공지능이 도입된 이후 경마 중계와 흡사해졌다.”라고까지 말합니다.
작가는 AI가 과거 사례의 패턴을 분석해, 현재 상황에 적용하는 현상이 바둑계를 넘어 사회 전 분야로 확산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대부분의 의사결정 상황에서 결과에 대한 확률, 즉 가장 합리적인 길을 안내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의사결정 상황에서, 그 확률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는 이를 '내비게이션 딜레마'라는 비유로 설명합니다. 차에 탄 동승자들이 운전자가 당연히 내비게이션의 제안을 따를 것이라고 기대하는 상황에서, 운전자에게는 그 제안을 거부할 자유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확장하여, 작가는 조직이나 사회가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마다 AI의 제안을 계속 따른다면, 결국 그 조직과 사회는 실질적으로 인공지능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즉, AI가 전문가의 권위를 무너뜨리게 되는 것이지요.
법조계라고 다를까요? 머지않아 AI가 특정 소송의 승소 확률을 분석하고 최적의 변론을 제시하는 날이 올 겁니다. 그때 변호사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저는 이 질문 앞에서 2016년 세기의 대국을 복기하며, 알파고의 ‘손’이 되어주었던 아자 황 박사를 떠올렸습니다. 아자 황은 스스로 수를 결정하지 않고, 알파고의 판단을 현실 세계의 바둑판 위에 옮겼습니다. 어쩌면 미래 변호사의 역할이 바로 이 아자 황의 길일지 모릅니다. AI가 내놓는 최적의 법률 분석 결과를 소송을 통해 실행하는, AI와 현실 세계를 잇는 인터페이스 말입니다.
당연히, 인간에게는 아자 황 역할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저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서 그치는 역할, 그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모습일까?’라는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직업의 ‘가치’에 관한 문제일 것입니다. 책에는 AI 시대에 ‘인간의 바둑’이라는 것이 남아 있는가, ‘바둑의 본질적인 가치’는 무엇인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에 마주하게 된 바둑 기사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그들이 먼저 겪은 미래는 저에게도, 우리에게도 현실이 되겠지요. 핵심 가치라고 믿고 있던 어떤 것이 너무나도 쉽게 부정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문득, 어릴 적 읽었던 만화 <히카루의 바둑(고스트 바둑왕)>이 생각납니다. 간략하게 줄거리를 소개하면, 바둑에 문외한이던 주인공 ‘히카루’는 바둑의 신격인 ‘사이’라는 유령을 만나, 사이가 시키는 대로 바둑을 두게 됩니다. 그러던 중, 히카루는 바둑에 흥미를 느끼고, 사이가 시키는 대로가 아닌, 히카루 자신의 바둑을 두게 됩니다. 그리고, 사이는 자신의 역할이 다했음을 깨닫고, 히카루 곁에서 사라집니다.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히카루의 바둑’이 시작됩니다.
저는 AI 시대에 전문가의 길이 ‘정말 아자 황의 길 밖에 남지 않은 것일까?’, ‘히카루의 길은 없을까?’라는 질문을 멈추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딘가는 히카루의 길이 남아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책에서 작가는 AI 기술이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키고, 기존의 가치를 흔들고, 의미를 변화시킬 것이라 예측하면서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좋은 상상을 하고,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미래를 바꾸는 것.” 즉, 기술이 우리의 가치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치가 기술을 이끌게 하는 것 말입니다.

저는 ‘히카루의 길’은 거창한 곳에 있지 않다고 믿습니다. 제가 매달 ‘로글로그’에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저의 ‘진짜 경험’을 꾸역꾸역 기록하는 것도, 어쩌면 저만의 방식으로 페달을 밟아보는 것과 같습니다. 자전거 출퇴근으로 체력을 단련하고, 틈새 독서로 생각을 넓히고, 회사 내에서 동료들과 함께한 모든 경험과 노력이, 단순히 ‘변호사로서의 나’를 넘어, 결국에는 그 누구도, 그리고 AI도 대체할 수 없는 ‘진짜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AI가 내놓는 95%의 정답 앞에서, 나머지 5%의 의미를 고민하고, 동료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보며, 결국 ‘나의 수’를 두려는 노력. 그 작은 몸부림들이 모여, 우리 각자의 대체 불가능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 저는 믿고 싶습니다.
Ep 17.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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