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24. 09:09ㆍ법정보다 오피스: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변호사들의 진짜 세상사는 이야기 '변호사 커뮤니티' '로글로그' 입니다.
법정보다 오피스 :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 Ep 17. 과정이 결과보다 낫기를, 슬쩍 바라봄
▶ 우리가 완벽하게 패배한 ‘그 게임(The game)’
최근 온 가족이 둘러앉아 ‘포켓몬스터 배틀아카데미’라는 보드게임을 했습니다. 가족들과 쇼핑을 하다가 마트 장난감 코너에서 우연히 발견한 게임인데, 우리 가족 모두 처음 접하는 게임이었습니다. 물론 ‘포켓몬스터’는 이미 집안의 인기 캐릭터였지요.
저와 둘째 딸이 한 팀, 아내와 첫째 딸이 다른 팀이 되어 거실 한가운데 모여 앉아 승부를 시작했습니다. 게임 판을 펼쳐 두니 꽤나 그럴듯하더군요. 아이들도 계속 “진짜 포켓몬 배틀하는 것 같아!!”라고 외쳤습니다. 저희는 모두 초보였기에 룰도 익숙하지 않았고, 한 판을 끝내는 데 30분이나 걸렸습니다.

몇 번의 게임을 진행했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마지막 경기를 소개할게요. 저는 이 게임을 ‘그 게임(The game)’이라 칭합니다.
게임 초반은 우리 팀의 분위기가 아주 좋았습니다.
이미 몇 번의 게임을 진행한 후였기 때문에 저는 둘째 딸에게 제가 보유한 몇 가지 기술(?)을 전수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다수의 승부를 경험해 왔습니다. TMI를 말하자면 학창 시절에는 짧은 쉬는 시간에도 학교 건물 앞 농구 골대에 달려 나가 5점 내기를 하거나, 복도에서 팩차기를 하다가 여러 번 혼난 전력이 있을 정도로 승부에 익숙하지요. 친구들과 이렇게 놀다 보면, 자연스레 상대방을 놀리는 기술이 늘기 마련입니다.
둘째 딸에게 이렇게 익힌 몇 가지 기술을 전수했습니다. 제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자, 이번엔 ‘매지컬리프(공격력 100)’를 써 볼까요오~? 아니면 ‘할퀴기(공격력 20)’로 봐줄까요오~?”하고 물으면, 둘째 딸이 능청스럽게 “그러면, 할퀴기로 봐줄까요오~?”라고 답하는 식이었죠. 그렇게 말하고는 ‘메지컬리프’를 써서 상대 팀의 포켓몬을 기절시킬 때마다 우리(상대팀 포함)는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하지만 게임은 뜻대로만 풀리지 않았습니다. 중반을 넘어서자 승기는 완전히 상대 팀에게 넘어갔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동전 던지기 운도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게임이 잘 안 풀릴 때도 저와 둘째 딸은 머리를 맞대고 함께 몸을 위아래로 흔들며 몇 번이고 ‘파이팅!’을 외쳤습니다. 그 모습이 정말 웃기고 부러웠던 모양인지, 이기고 있던 아내도 큰 딸에게 “우리도 파이팅 하자.”라고 애원해 봤지만, 파이팅은 그렇게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지요.
아무튼 결론을 말하자면, ‘그 게임’에서 우리는 패배했습니다. 하지만 둘째 딸은 분한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는지, “아, 아깝다, 정말 재밌었는데.”, “다음에는 다른 캐릭터로 해 볼까요오~?”라면서 까불었습니다.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온 가족이 나눈 농담과 웃음, 함께 으쌰으쌰 했던 그 모든 순간이 결과와 상관없이 충만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게임’은 제게 이런 질문을 던져주었습니다. 과정의 즐거움만으로 이토록 완벽했던 이 시간. ‘우리는 결과가 아닌 과정을 중시할 수 있을까?’
▶ 다른 종류의 악보를 읽는 아이
‘과정’과 ‘결과’ 사이의 이 묘한 줄다리기는 게임 판 위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빠라는 역할 속에서도 이 고민과 마주하게 됩니다. 최근에는 큰딸의 악기 교육 문제를 두고 비슷한 생각에 잠긴 적이 있습니다.
아이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큰딸은 몇 번 악기에 도전했습니다. 지금껏 악기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부모의 욕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배운다는 피아노도, 우아해 보이는 바이올린도 시작은 했지만 아쉽게도 꾸준함으로 이어지진 못했습니다. 그러던 아이가 최근에는 뜬금없이 하프를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악기를 배워보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부모로서의 고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하프는 지속 가능한 취미는 아닌 것으로 보였습니다. 주변 학원에 알아보니, 다행히 연말에 이루어지는 공연을 위하여, 하프를 배워볼 수 있다고 하더군요.
하프라는 악기 자체보다는, 적어도 음악에 대한 관심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앙상블을 경험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배움에 돌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를 주제로 아내와도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결과를 위해, 지루한 과정을 견디는 법을 가르쳐야 하는 것은 아닐까?’, ‘때로는 부모가 조금 강압적으로 지도해야, 아이가 비로소 성취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들 말이지요. 즉, 하프를 평생 할 것도 아닌데, 그 시간과 돈을 들일 바에야 피아노를 다시 배우는 것이 맞지 않겠냐는 것.

하지만 저는 일단은 아이의 편에 서기로 했습니다. 결정적으로는 큰딸이 해준 말 때문이었습니다.
“아빠, 하프는 조금 틀려도 아름다운 소리가 나서 마음 편하게 연주할 수 있어.”
“그리고 피아노는 연습실에서 혼자 해야 하는데, 하프는 친구들이랑 같이 연습해야 해서 좋아.”
아이의 말 속에서 저는 어렴풋이 답을 보았습니다. 아이는 이미 결과의 완벽함보다 과정의 안정감을, 개인의 성취보다 함께하는 즐거움을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현실적인 고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몇 달짜리 경험으로 끝나면 어쩌지?’, ‘그 돈이면 차라리 조금 더 푸시해서 피아노라도 마치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옵니다. 어쩌면 아이는 과정의 즐거움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아빠인 저만 여전히 결과라는 낡은 악보를 붙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지도
제가 일상에서 마주한 질문은, 일을 할 때에도 적용해 볼 수 있지요.
먼저, 아래의 에피소드는 현재의 회사나 직전의 회사 하나에서 발생한 특정한 사실만을 기재하였다기보다는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리한 내용이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늘 회사 내부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지는 고민하고 있어, 너무 구체적인 묘사는 피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의미가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말씀드릴게요.
모든 회사가 마찬가지이겠지만, 각 회사의 사업 구조에 완벽하게 적합한 법률 혹은 제도에 대한 안내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 법률가가 특정 법규의 의미를 해석해 낼 때에는 법원의 최종 판단을 바탕으로 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업 분야에 따라서는 충분한 양의 판례가 축적되어 있지 않기도 하지요. 때문에, 사업과 관련된 제도와 계약, 법규의 영향력을 분석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범용의 교과서나, 리딩 케이스를 중심으로 정리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저는 회사에서 진행하는 사업과 관련하여 ‘우리 회사 맞춤형 가이드라인’을 만들 기회가 있었는데, 막상 시작하니 막막했습니다. 사업 모델에 딱 맞는 참고 자료는 인터넷을 검색해도, 전문 서적을 뒤져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지난 수년간의 계약서들을 모두 꺼내 하나하나 분석하고, 각 사업부의 동료들을 찾아가 그들이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이 무엇인지 인터뷰했습니다.
그렇게 조각난 정보들을 모아, 우리 사업의 구조를 따라가며 권리와 의무, 리스크를 한 땀 한 땀 정리해 나갔습니다. 이 과정은 단순한 문서 작업을 넘어, 마치 아무도 그린 적 없는 ‘우리 회사 비지니스’라는 대륙의 지도를 혼자서 완성해 나가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퇴근 후에도 머릿속에는 관련 프로젝트가 맴돌았습니다. 일상에서까지 몰두했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법률가로서, 전문가로서의 자부심과 지적인 희열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눈이 소복이 쌓인 길 위에 첫 발자국을 낸다는.
몇 달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꽤 많은 내용을 잘 정리한 가이드라인을 완성하였습니다. 스스로 보기에도 뿌듯한 결과물이었습니다. 사내에 공유하며 많은 동료들이 이 지도를 길잡이 삼아 험난한 바다를 잘 헤쳐 나가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바쁜 업무에 쫓기는 동료들에게, 문서는 그저 또 하나의 ‘읽어야 할 자료’일 뿐이었습니다. 여전히 동료들은 가이드라인을 찾아보는 대신 예전처럼 메신저로 질문을 던져왔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지도가 서재 한편에서 먼지만 쌓여가는 것을 보는 듯한 안타까움이 밀려왔습니다.
사실 KPI 관점에서 본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자료들을 적당히 짜깁기해서 ‘가이드라인 N종 발간’이라는 결과만 만들어 내도 됐을 테니까요.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제가 던지고 싶은 질문의 핵심입니다. 나만이 오롯이 간직한 과정의 충만함과, 타인의 무관심이라는 냉정한 결과가 충돌할 때, 그 과정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마음가짐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지. 즉, ‘결과’라는 단 하나의 잣대 앞에서, ‘과정’의 즐거움은 그저 개인의 미련한 자기만족으로 남아야만 하는 것일까?
▶ 그럼에도, 나만의 지도를 그리는 이유
패배했지만 완벽하게 즐거웠던 포켓몬 게임, 결과의 완벽함보다 과정의 즐거움을 택한 아이의 하프 연주, 그리고 아무도 펼쳐 보지 않을지도 모를 지도를 그리며 느꼈던 전문가로서의 희열. 이 세 가지의 경험은 서로 다른 풍경을 하고 있지만, 저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결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세상 속에서, 나는 ‘과정’의 가치를 지켜낼 수 있을까?
저의 노력을 조금 더 말씀드릴게요. 저는 동료들의 외면이라는 냉정한 현실 앞에서 마냥 좌절하고만 있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동료들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지도의 내용을 조각내어 그들의 손에 직접 쥐여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딱딱한 원문을 생성형 AI의 도움을 받아 짧은 만화나 카드뉴스 형식으로 만들어 공유하고, 관련 자문이 들어올 때마다 자연스럽게 해당 부분을 안내하며 지도의 활용도를 높여갔습니다. 그런 노력 덕분에, 서랍 속에 잠들어 있던 지도는, 조금씩 이용 가치가 생기기도 하였지요.
물론, 이 노력들이 저의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이 되어 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이 분투 자체가 또 다른 질문을 낳기도 합니다. 이런 몸부림이, 결국에는 외면받았던 나의 과정을 어떻게든 결과로 인정받고 싶다는 몸부림은 아니었을까 하는.
결과가 좋지 못하면 과정의 의미마저 퇴색되기 마련인 현실 속에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정을 즐기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우리가 속한 조직은, 때로는 패배하고 때로는 미완성으로 남을지라도 그 여정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문화를 과연 허용할 수 있을지. 그리고 다시 거실 한가운데, 아이들과 마주 앉은 나는, 그들이 온몸으로 보여주는 삶의 지혜를 온전히 배우고 있는 것인지. 계속 고민이 됩니다. 게임 판은 정리되었지만, 제 마음속에는 여전히 많은 질문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습니다. 아직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였지만, 적어도 ‘과정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역시 좋지 아니한가’라는 결론에 다다르기를 슬쩍 바라면서.
Ep 18.에서 계속.......
'법정보다 오피스: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법정보다 오피스 :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 Ep 19. 산타가 남긴 부스러기 by 이현욱 (1) | 2026.03.04 |
|---|---|
| 법정보다 오피스 :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 Ep 18. 운동화 대신 식판을 들기까지 by 이현욱 (2) | 2026.02.04 |
| 법정보다 오피스 :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 Ep 16. AI 시대, 인간의 '수' 를 찾는 길 by 이현욱 (3) | 2025.11.26 |
| 법정보다 오피스 :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 Ep 15. 보고서를 쓰다 문득 떠오른 말에 관하여 by 이현욱 (1) | 2025.10.20 |
| 법정보다 오피스 :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 Ep 14. 나라에서 허락한 유일한 자랑거리, 간식 예찬 by 이현욱 (0) | 2025.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