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 20. 15:17ㆍ캐나다 출신 외국변호사의 한국적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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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출신 외국 변호사의 한국 적응기
- Ep 11. 지나고 나니 한때 였던 것들
로스쿨 시절, 나의 하루는 늘 같았다. 창문이 거의 열리지 않는 기숙사, 하루 종일 판례와 씨름하며 책 속에 파묻혀 지내던 날들. 창살 없는 감옥 같았달까. 가끔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예쁘고 젊은 시절을 이렇게 보내도 괜찮을까?’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고 있었지만, 그 시절의 나를 온전히 사랑하지는 못했다. 학교와 집을 오가며 쳇바퀴처럼 살던 그땐 세상이 너무 좁게 느껴졌다. 창문 밖으로 보이던 노을조차 내게는 멀리 있는 자유 같았다.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이 잠깐 커피라도 마시자고 하면, 그 당시의 나는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다며 그런 여유를 사치라 여겼다.
지금 와서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땐 왜 그랬을까. 친구들과의 그 짧은 시간이 어쩌면 그 시절 내가 누릴 수 있던 최고의 호사였을 텐데.’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꽤 불안했고 조급했다. 시험 하나에 목숨을 걸었고, 결과에 연연하며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 모든 시간이 결국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에게 “고마워, 잘 버텨줘서.”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 누리는 안정과 여유는 그 시절 새장 같은 공간에서 버텨낸 하루하루의 보상이었다.
결국 모든 시간은 지나가고, 돌아보면 한 시절의 얼굴로 남는다. 아빠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This too shall pass.”라는 말을 새기라고 하셨다. 인생의 한 모퉁이일 뿐이라고, 그 모퉁이를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억조차 희미해질 때가 온다고.
남편은 영화 〈라라랜드〉를 스무 번쯤 봤다고 했다. 왜 그렇게 반복해 봤을까 궁금했는데, 나중에 그 이유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라라랜드〉는 두 주인공이 서로를 깊이 사랑하지만, 결국 각자의 꿈을 선택하며 다른 길을 걷게 되는 이야기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이 우연히 마주쳐 서로의 눈을 마주 보는 순간, 만약 다른 선택을 했다면 펼쳐졌을 ‘가상의 미래’가 한 편의 서사처럼 흘러간다. 그 장면에는 함께였던 시간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어른의 마음이 담겨 있다.

아마 남편에게도 그 순간은 젊은 날의 어떤 꿈, 지나가 버린 사랑,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향기를 떠올리게 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같은 영화를 스무 번 넘게 보며, 잃어버린 꿈과 한때 가슴 뛰게 했던 시절, 스쳐 지나간 자신의 ‘한때’와 조용히 인사를 나눈 게 아닐까.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 인연’이 있다. 꼭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조금 더 순수하고 서툴렀지만 치열했던 그 시절의 나 자신과 맺었던 인연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과거를 사랑하고, 그 시절의 우리를 그리워하며 산다.
“지나고 나니 한때였던 것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다. 열흘 동안 붉게 피는 꽃이 없듯, 영원히 빛나는 시절도 없고 영원히 어두운 시절도 없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조차 언젠가 또 하나의 추억의 페이지로 남을 것이다.
요즘 가끔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을 들으면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며, 그 노래 속에 녹아 있는 한때의 향기를 느낀다.
“너에게 난 해 질 녘 노을처럼, 한 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싶어.”
지나고 나니, 정말 그랬다.
이 노래를 들으면 자연스레 ‘우리의 한때’가 떠오른다. 남편과 처음으로 함께 자전거를 타던 날의 바람 냄새, 산토리니에서 해가 지기 직전 보랏빛 노을 아래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순간, 향기로운 벚꽃이 흩날리던 제주도의 길을 달리던 나른한 오후, 처음으로 함께 간 글램핑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시시콜콜 이야기를 나눴던 한여름 밤의 온기 같은 것들. 아주 작고 사소했지만, 지나고 나니 어느 계절의 한 장면으로 또렷이 남아 있는 순간들이다.
모든 관계도, 모든 계절도, 모든 노력도 결국은 한 시절이었다. 우리가 지나온 모든 한 시절의 온도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듯, “한 시절을 함께한 우리”라는 말이 그 모든 시간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다.
그땐 알았을까? 그 웃음이, 그 눈빛이, 다시는 오지 않을 시절의 온기였다는 걸. 그땐 알았을까? 벚꽃길의 설렘과, 햇살 아래 웃던 그 평범한 하루가 마음속에 오래 남을 장면이 될 줄을.
돌이켜보면 모든 건 한때였다. 뜨겁게, 순수하게, 때로는 아프게 지나간 그 시절의 나는 이제 그 기억을 가끔 꺼내 보며 현재를 산다. 그 아름다웠던 감정들은 어쩌면 아직도 〈너에게 난, 나에게 넌〉 같은 노래 속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른다.
EP. 12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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