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2. 18. 16:40ㆍ미국 컴플라이언스 변호사의 한국 준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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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컴플라이언스 변호사의 한국 준법 이야기
Ep 10. 불확실성이라는 파도를 넘는 법 : 어느 49% 변호사의 고백
유례없는 ‘불확실성의 시대’가 도래한 듯하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급격하게 빠른 기술 발전과 전 세계적인 정치, 외교적 혼란으로 전 세대가 학업, 진로, 직장, 가족, 생계, 노후 등의 문제로 막막해한다. 누군가는 예전에도 이런 고민들은 항상 있었던 것들이고 모든 세대가 반복해서 자신들만의 문제라고 착각하는 문제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전에 비해 문제들이 훨씬 복잡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제는 더 이상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을 다녀도, 저축으로만 보금자리를 준비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한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성공도, 노후도, 심지어 생계조차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은퇴하기 전부터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하고, 탄탄해 보이는 직장마저도 더 이상 탄탄하지 않다. 마치 거센 폭풍이 몰아치는 망망대해 위에 조각배 하나를 띄워 놓은 듯한 불안감이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스며드는 듯하다.

이러한 불안감은 법조계에도 스며들고 있다. 미국에서 열린 한 경제학회에서 전 미국 노동통계국장이 ‘앞으로는 법률 리서치는 인공지능이 할 것이기 때문에 법조인이 되어서는 미래가 없다’는 말을 하기도 했고, 실제로 당장 국내 로펌만 봐도 2년만에 신입 변호사 채용률이 14% 줄었다고 한다. 주위의 변호사들도 실제로 주니어 변호사들을 뽑는 대신에 AI에 의존하는 게 비용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관리 측면에서도 더 효율적이라는 말을 종종 한다. 나 같이 경력이 좀 쌓인 변호사들도 불안하겠지만, 엄청난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여 이제 막 변호사가 된 사람들은 얼마나 더 많은 걱정이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은 젊은 세대들에게 용기를 주는 차원에서, 내가 처음 변호사가 되었을 때의 개인적인 경험을 조금 공유하고자 한다. 시대가 변했고 상황은 많이 다르지만, 내가 처음 변호사가 되었을 때도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내가 졸업했을 당시 미국에서는 10여 년 만에 최악의 경제위기가 닥쳐, 취업할 수 있는 직장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당시의 경제위기는 미국 은행들이 집값이 계속 오를 것이라는 착각 속에 신용도가 낮은 사람들에게 무리하게 주택 자금을 빌려준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에서 시작되었다. 부동산 거품이 꺼지고 금리가 오르자 대출자들이 돈을 갚지 못하게 되었고 리만 브라더스와 같은 대형 금융 기관들을 필두로 전 세계 금융 기관들이 연쇄적으로 파산하거나 위기에 빠졌다.

난 이때 법대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나의 성적은 변변치 못했다. 정확하게 전 학생 중 겨우 상위 49%에 속했다. 좋은 법률 회사에서는 주로 상위 10%의 졸업생을 변호사로 고용하였고, 이런 법조계의 고용 시스템에서 내 점수는 좋은 직장을 구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설상가상으로 큰 문제가 한 가지 더 있었다. 미 정부에서 유학생들에게 주는 취업 허가(OPT, Optional Practical Training)가 체류를 허가하는 시간은 딱 1년이었고, 그 기간 동안 나를 고용할 법률 회사로부터, 얼마 전에 급격한 지원 비용 상승으로 화제가 되었던 H1B 취업 비자라는 것을 받아야만 미국에 더 있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매우 어렵게 찾은 한 중소 법률 회사에서 무급 인턴으로 일을 시작하기로 했고, 그 법률 회사에서는 경기가 어려우니 고객을 데려온다면 취업 비자를 후원해 줄 수도 있다는 매우 애매모호한 약속을 했다. 무급 인턴이 1년 차부터 고객을 유치하는 일은 아마 유례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 법률 회사의 가장 큰 고객 중 하나는 미국 수출입은행이었다. 이 은행은 미국 수출업자들에게 수출 대금에 대한 수출 보험을 제공하고, 만약 외국 수입자가 대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보험금을 수출자에게 지급한 후, 미납된 수출 대금을 대신 회수하는 일을 한다. 그리고 수출 대금을 회수하는 일을 하는 데 있어 우리 법률 회사를 고용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하는 일을 우연찮게 알게 된 한국에서 오신 교수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기관이 있어요. 한국무역보험공사라고. 아마 미국에도 지사가 있을 거예요.” 알아보니, 놀랍게도 미국 뉴욕과 캘리포니아에 한국무역보험공사의 지사가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용기를 쥐어짜서 가까운 뉴욕 지사에 무조건 전화를 했다. 내 소개를 하고 법률 회사를 설명했지만, 전화를 받은 직원의 대답은 간단했다. “이미 거래하는 법률 회사가 있습니다.” 깔끔한 거절과 통화 종료.
거절당한 지 한 30분이 지났을까, 같은 전화번호로부터 내 핸드폰에 전화가 울렸다.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자, 아까 전화를 받은 직원과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얼마 전에 한국에서 부임한 부지사장 OOO인데요, 미국 법률 회사랑 일하는 게 어려워서, 안 그래도 한국말을 할 수 있고 좀 편하게 일을 할 수 있는 법률 회사를 찾고 있었습니다. 한 번 저희 회사에서 얘기해 보시죠. 며칠 내로 한 번 방문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며칠 뒤, 나는 미리 마련한 계약서를 들고 내 인생 첫 뉴욕 출장을 떠났다. 그리고 그날 내 인생에서 첫 번째이자 가장 큰 고객을 만들었고, 점차 관계를 쌓으며 수많은 케이스들을 수임받게 되었다. 법률 회사에서는 약속한 대로 취업 비자를 후원하여 주었고, 이 고객을 기반으로 약 9년간 같은 법률 회사에서 나만의 입지를 다지면서 비교적 편하게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처음 전화를 받은 직원은 알고 보니 동갑내기 친구여서 미국에 사는 동안 매우 가깝게 지내는 지인이 되었고 아직까지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이 이야기는 나의 무용담같이 들릴지 모르겠지만 잘 읽어보면 나의 노력과 활약은 정말 소소하다. 내가 유일하게 한 것은 용기를 내서 전화 한 통화를 한 것밖에 없다. 한국무역보험공사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부지사장이 당시에 뉴욕지사에 부임을 하게 된 것도, 마침 한국말을 구사할 수 있는 법률 회사를 찾고 있던 것도 전부 다 ‘운’ 또는 ‘우연’에 불과했다. 내가 전화를 한 시점과 상대방의 나와 같은 사람이 필요했던 시점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 것뿐이었다.
그 이후로도, 그 법률 회사에서 일하는 9년의 시간 동안 한국무역보험공사와 같이 좋은 고객을 추가로 만들기 위해 연사를 하고 글을 기고하는 등 각방으로 많은 노력을 했지만, 노력에 비해 큰 성과가 없었다. 인생의 많은 일들은 이렇듯 우연과 노력의 절묘한 조합으로 벌어지지만, 결코 노력이 양적으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내 경험상으로는 우연이 더 큰 역할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당시 어려웠던 경기가 나중에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매년 미국에서 받아주는 취업비자는 한도가 정해져 있다. 내가 지원하기 바로 전년도까지만 해도 지원자가 너무 많아 후원을 받은 학생 중 절반 이상이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가 지원을 한 년도에는 경제위기 때문에 한도가 전혀 채워지지 않아 아무런 경쟁 없이 매우 쉽게 취업 비자를 후원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일이 잘 풀리고 안 풀리는 것은 ‘나의 문제’가 아닌 경우가 많다. 나도 수많은 직장을 지원하고 떨어져 봤다. 어떤 때는 내부 승진을 시키기로 막판에 결정을 해서 마지막 인터뷰를 성공적으로 마치고도 안 된 경우도 있고, 또 한 번은 회사 상황이 어려워져 해외지사 자체를 닫는 바람에 이직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이직을 못 한 것이 너무 다행이다.
또 내 주위에는 도저히 직장을 구하기가 힘들어, 처음부터 개업을 한 분들도 계신다. 당시에는 좌절하고 힘들어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퇴직이나 해고 걱정 안 하고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일찌감치 마련해 나를 포함한 주위 사람들의 많은 부러움을 사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보다 ‘일어난 일에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아닌가 싶다.
역사 속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수없이 많이 일어났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례는 인상파 화가들의 이야기다. 클로드 모네나 세잔과 같은 거장들도 당시에는 프랑스 미술계의 절대 권력이었고 사실주의적인 그림만을 선호했던 살롱(Salon)으로부터 전시를 거절당한다. 당시 화가들에게는 살롱에게 거절당한다는 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좌절하는 대신, 거절당한 사람들끼리 모여 ‘거절당한 사람들만의 전시회(Salon of the Refused)’를 시작하게 하였고, 그 과정에서 ‘인상주의’라는 위대한 미술사의 혁명을 탄생시키게 된다. 살롱 입성 실패는 당시에는 실패로 보였지만 긴 미술사의 여정에서 보면 필연적인 과정이었던 셈이다.
이렇듯,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떤 일이 어떻게 풀릴지 모르니 젊은 세대들이 끊임없이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한다.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것은 오래된 지혜인 것 같다. 거센 바람이 불 때 뿌리 깊은 나무의 진가가 드러나듯, 삶이 흔들릴수록 우리가 붙잡아야 할 진리는 하나다. 역경과 실패는 성장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과정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내 젊은 시절의 경험담이 아주 조금이나마 불확실성의 시대를 더 오래 살아가야 할 젊은 세대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Ep 11.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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