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보다 오피스 :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 Ep 19. 산타가 남긴 부스러기 by 이현욱

2026. 3. 4. 09:31법정보다 오피스: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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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보다 오피스 :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 Ep 19. 산타가 남긴 부스러기 

 

 

우리 집에는 지난 3년간 이어진 짧은 전통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아이들이 쿠키로 작은 집을 만들고, 코코아를 타서 식탁 위에 올려두는 일입니다. 선물을 전해 준 산타 할아버지를 위한 아이들의 선물이지요.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저와 아내는 산타가 다녀간 흔적을 남기기 위해 그 쿠키 집을 조금씩 먹어 두고, 몰래 선물을 포장합니다. 그리고 모든 준비가 끝난 뒤에야, 부부 둘이서 평소에는 쉽게 고르지 않던 영화를 한 편 보는 것으로 크리스마스이브를 마무리합니다. 다음날 아침이면, 짜잔. 멋진 크리스마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그 풍경 앞에서 조금 다른 마음이 들었습니다. 산타가 쿠키를 먹고 있는 장면을 생성형 AI로 만들어 보여주면 어떨까 하고요. 요즘 기술로는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고, 아이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그럴듯한 사진 한 장쯤은 금방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산타의 얼굴이나 자세, 쿠키 부스러기까지도 얼마든지 자연스럽게 연출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사실, 살짝 테스트를 해보기도 했습니다.

 

 

 

큰아이는 이미 산타를 전적으로 믿는 시기를 조금씩 지나고 있었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산타가 없다는 이야기도 오가고, 어른들이 선물을 준비한다는 말도 들려오는 나이였습니다. 믿음과 의심이 섞여 있는,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부터가 이야기인지 스스로 가늠해 보려는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인지, 너무 분명한 증거를 하나 더 얹는 일이 과연 맞는 일일지 선뜻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 의견을 아내에게 이야기했을 때, 아내는 잠시 망설이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큰아이가 이제 제법 컸는데, 굳이 조작된 증거까지 만들어서 믿음을 더 붙잡아 두는 게 맞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듣고 보니 그랬습니다. 산타가 있다는 믿음을 지켜주는 일과, 아이가 세상의 비밀을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꼭 같은 방향을 보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해오던 대로, 사진 대신 부스러기를 남기기로 했습니다.

 

대신, 아이에게 이런 말은 해주었습니다. “혹시 산타는 산타를 믿는 아이들에게만 찾아오는 건 아닐까?” 하고요. 아빠도 어느 순간 산타 할아버지가 있는지 의심하게 되면서부터는 선물을 받지 못하게 된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AI 산타 사진까지 만들어 주면서 아이의 동심을 붙잡아 두는 일은 내키지 않았으면서도, 그렇다고 시원하게 “이제야 알았구나, 내가 산타란다.”라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저 아이가 동심을 한 해만 더 간직했으면 하는 마음이었으면서도, AI 산타는 조금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에서의 엉뚱한 고민은 잠시 미뤄둔 채, 현실의 저는 1년 중 가장 바쁜 연말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연말이 되면 회사에는 늘 분쟁과 검토 요청이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일정은 촉박하고, 상황을 빠르게 정리해 달라는 요청은 쌓입니다. 그중 상당수는 이미 결론이 어느 정도 정해진 상태에서, 마지막 확인을 받기 위해 법률가에게 건네지는 질문들이었습니다.

 

분쟁을 두고 오가는 질문들은 대개 비슷합니다. 이 경우 법적으로 누가 유리한지, 소송으로 가면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지금 이 선택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지에 대한 확인이었습니다. 질문의 형식은 달랐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요청으로 모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법적 판단’을 내려달라는 것입니다.

 

몇 번째 의견서인지도 가늠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밀린 의견서를 하나씩 정리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비슷한 쟁점과 문장들이 반복되는 와중에, 내가 쓰고 있는 이 의견서가 어쩐지 집에서 떠올렸던 AI 산타와 닮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법적으로는 충분히 설명이 되는 결론이었지만, 이 결론이 과연 비즈니스의 관점에서도 최선의 답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쉽게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법률가인 나는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 걸까, 법적으로 가능한 해석을 제시하는 데 그쳐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 해석이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라는 점까지 함께 이야기해야 하는 걸까 하는 고민이 뒤따랐습니다.

 

아이가 산타의 존재를 의심하면서도 선물을 기다리듯, 회사에서 분쟁을 마주한 사람들 역시 리스크를 알고 있으면서도 어딘가에서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 불안한 마음 앞에서, 누군가는 AI로 만든 사진처럼 분명한 증거와 결론을 기대합니다. 법적 검토가 아닌, 마음을 놓게 해 주는 말을 바라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법적 결론’이 언제나 그런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조건 된다는 말도, 절대 안 된다는 말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어쩐지 너무 인위적인 답처럼 느껴졌습니다. 아이 앞에서 AI 산타 사진을 꺼내지 않았던 것처럼, 그 불안을 단번에 덮어버릴 만한 말은 쉽게 꺼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작성하던 의견서를 조금 고쳐보았습니다. 확신을 주는 문장보다는, 리스크의 모양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문장들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쿠키 부스러기를 보고 아이가 스스로 산타를 떠올리듯, 이 문장들 사이에서 각자가 감당할 수 있는 선택을 가늠해 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법률가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답을 대신 골라주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판단 앞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법적 관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은 제 의견서가 AI 산타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이의 고민과 성장을 대신 결정해 버리는 AI 산타처럼, 법적 승리가 곧 비즈니스의 성공인 것처럼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법적으로는 이길 수 있는 싸움이라 하더라도, 때로는 상처뿐인 승리보다 적당한 양보로 관계를 지키는 편이 더 나은 판단일 수도 있으니까요. 크리스마스를 앞둔 연말 제가 건네는 문장들은 ‘이게 정답입니다.’라고 단정하는 마침표보다는, ‘이런 관점도 있습니다.’라고 조심스럽게 남겨두는 부스러기에 가까웠으면 좋겠습니다.

 

Ep 20.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