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3. 11. 09:18ㆍ저연차 사내변호사의 성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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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연차 사내변호사의 성장기
- Ep 9. 사내변호사가 회사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
며칠 전 재판 출정을 위해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향했다. 벌써 세 번째 기일인지라 사건의 진행 방향도 어느 정도 잡혔고, 판사님도 유하고 친절한 편이라 첫 기일 때처럼 긴장되진 않았다.
늘 하던 대로 내 재판 시간보다 최소 30분은 일찍 도착했다. 나는 재판 시작을 기다리는 그 30분이 좋다. 사내변호사로 일하다 보면 법정에 설 기회가 송무 변호사들만큼 잦지 않다. 그래서 다른 사건의 기일을 구경하는 이 시간이 작은 견학 같다. ‘재판부는 어떤 소송지휘를 하지?’, ‘사실 관계는 어떤 순서로 정리하게 만들지?’, ‘어떤 부분을 쟁점으로 보지?’ 같은 걸 간접적으로 배우는 시간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날은 법원 공기가 조금 달랐다. 기일을 몇 개 지나며 내가 봐온 판사님과는 다르게 조금 격양되어 계셨다. 확실히 내가 그동안 참석한 기일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이유인즉슨 유난히 당사자 소송이 많았던 탓에 판사님이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소송을 직접 수행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변론에 대해서 설명을 하느라 답답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원고는 변호사를 선임하였고, 피고는 당사자가 직접 수행하는 건으로 사기 취소를 이유로 가맹점 비용에 대해 반환을 청구하는 사건이었다. 딱 보니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기일 같았고 판사님이 확인하려던 건 단순했다. ‘가맹점 계약 당사자가 누구인지’, ‘얼마가 오갔는지’, ‘언제 지급됐는지.’ 에 대해 정리되길 원했다. 그러니까 사건의 뼈대. ‘팩트’였다.
그런데 피고는 ‘기망’이라는 단어에만 꽂혀 있었다. 판사님 질문이 사실 관계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피고는 더 억울하다는 감정으로만 흘러갔다. “저는 사기치지 않았어요.” “기망이 아니라요.” “자꾸 기망이라고 하니 억울합니다.”....
판사님은 결국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기망이라는 그 단어에 흥분하지 마시고요. 일단 사실관계부터 확정해야 합니다. 계약 당사자가 누구고, 얼마가 지급됐고, 누구에게 들어갔는지부터요. 그게 선행돼야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묘하게 웃음이 나왔다. 사실 관계 확정이 우선이라는 말은 내가 회사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말이다.
“팩트인가요?”
“사실 관계부터 확정해야 합니다.”
“검토 후 회신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내 사건의 변론을 잘 마치고 법정을 나오고 나서도 이상하게 사실 관계를 확정해야 한다면서 격양된 목소리로 피고를 향해 말하는 판사님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사실 관계가 틀어져 버리면 법리를 제대로 적용할 수 없고 그러면 원고, 피고 누군가에겐 매우 불리한 일이다. 하지만 격양되어 말하는 판사님을 보며 상대방은 조금은 서운? 무서울 수도 있겠지 싶은 거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도 회사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사실 관계 확정이 필요합니다.”, “팩트 체크는 하셨어요?” 이런 말이다. 어떻게 보면 상대방을 믿지 못해 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가끔 이렇게 들릴지도 모른다. ‘왜 저 사람은 사람 말을 안 믿지?’ 혹은 ‘왜 이렇게 차갑지?’ 라고 말이다.
그러다 보니 확인해야 하는 기초 사실보다는 사람들은 더욱 더 자신이 하고 싶은 말, 원하는 점, 억울한 점을 먼저, 많이 얘기하려고 한다. 그 반작용으로 답답해진 마음에 나 역시 격양되기도, 쌀쌀맞을 때도 있다.
회사에서 누군가 “급해요.”라고 말할 때 내가 묻는 건 늘 비슷하다. ‘누가 했고’, ‘언제 했고’, ‘어떤 근거로 했고’, ‘문서가 있는지’이다. 정작 상대는 ‘지금 당장 원하는 답’을 듣고 싶은데, 나는 ‘답을 내기 위한 바닥’부터 깔자고 하니 대화의 속도가 맞을 리 없다. 그러니 그분들은 점점 더 크게, 더 간절하게 억울함과 필요를 말하고, 나는 점점 더 짧게 “팩트부터요.”를 말하게 된다.
그런데 법원에서 그 장면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고 나니, 내가 평소에 던지는 그 한 문장이 상대방에게는 얼마나 차갑게 들릴 수 있는지 갑자기 실감이 났다. “사실 관계부터요.”라는 말이 사실은 “당신 말을 아직 못 믿겠어요.”로 번역될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내 말버릇에 작은 자막을 하나 붙여보기로 했다.
“팩트인가요?”
(나도 당신 편이고 싶어서요. 그러려면 진실된 사실 관계가 필요해요.)
“사실 관계부터 확정해야 합니다.”
(기초가 되는 사실 관계를 제대로 확정해야 검토에 오류가 없어요.)
“검토 후 회신드리겠습니다.”
(시간을 조금만 주세요. 대신 제대로 답변드릴게요.)

물론 내일도 나는 “팩트 체크가 된 건가요?”라는 말을 아주 많이 할 것이다. 사내변호사의 하루는 대체로 ‘팩트 수집’에서 시작해서 ‘검토 후 회신’으로 끝나니까.
다만 그 문장을 꺼낼 때, 상대방이 “왜 이렇게 차갑지?”라고 느끼기 전에 내가 왜 묻는지부터 먼저 설명해 보려고 한다. 사실 관계는 사람을 몰아붙이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중에 억울해지지 않게 하려는 최소한의 장치니까!
Ep 10. 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