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출신 외국 변호사의 한국 적응기 Ep 12. “밥 한 끼 먹자.”라는 빈말 — 약속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 by 권현진

2026. 5. 6. 09:21캐나다 출신 외국변호사의 한국적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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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출신 외국 변호사의 한국 적응기 

- Ep 12. “밥 한 끼 먹자.”라는 빈말 — 약속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

 

 

조만간 밥 한 끼 먹자.”

 

이 말은 한국 사회에서 유난히 안전하다. 말을 꺼낸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 말이 실제 식사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연락이 오지 않아도 무례하지 않고,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도 책임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말은 종종 관계를 부드럽게 정리하기 위한 관용어처럼 사용된다. 너무 부드러워서, 아무 책임도 남기지 않는 말로.

하지만 나는 이 말이 늘 마음에 걸린다.

 

 

 

말은 기록되기 전부터 약속이다

 

법률 일을 하며 자연스럽게 생긴 관점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말이 문서가 되기 전부터 이미 일정한 책임의 무게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특히 상대방에게기대를 하게 만드는 말이라면 더 그렇다.

 

언젠가 보죠.”밥 한 끼 먹자.”는 다르다. 후자는 상대의 시간을, 그리고 마음 한편을 점유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킬 의사가 없는 말을 너무 쉽게 한다. 구체화할 생각도, 일정 조율의 의지도 없으면서 마치 예의처럼 던진다.

말은 가볍게 던질 수 있지만, 기대는 가볍게 사라지지 않는다.

 

캐나다에서는 이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 캐나다에서 생활하며 인상 깊었던 점 중 하나는 사람들이 직설적이고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보고 싶으면 “Would you like to grab lunch next week?(다음 주에 같이 점심 드실래요?)”라고 말하고, 그럴 의사가 없으면 굳이 돌려 말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관용어를 쓰지 않고, 실행할 생각이 없는 말은 애초에 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화는 훨씬 직관적이고 실용적(practical)이다. 그 말이 약속인지 아닌지를 해석하거나 추측할 필요가 없다. 말의 의미와 의도가 비교적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의 공통점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약속을 많이 한다. 곧 연락하겠다고 말하고, 본인이 하겠다고 말하고, 다음에 꼭 보자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들은 실행이라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이런 말로 책임을 회피한다.

 

“그냥 예의상 한 말인데, 그걸 진짜 약속이라고 생각했어?”

 

그러나 그 질문 자체가 이미 문제의 핵심을 드러낸다. 상대가 약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줬다면, 그 순간부터 책임은 시작된다.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말보다 먼저 움직인다

 

내 남편은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다. 쉽게 약속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가 한 말은 대부분 행동으로 먼저 나타난다. 언제 들어오겠다는 말, 함께 하기로 한 일정, “이건 내가 할게.”라는 말 같은 사소한 약속도 그는 대부분 실행으로 옮긴다.

 

데이트를 할 때도 그랬다. 약속 시간보다 늘 먼저 도착해 내가 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늦었다는 말을 들을까 봐서가 아니라, 기다리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회사에 출근할 때도 마찬가지다. 남들보다 늘 조금 더 일찍 나선다.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에,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이 맡은 역할을 준비해 두는 쪽을 택한다.

 

그 모습은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말없이 신뢰를 쌓아간다. 결혼을 하며 알게 된 건, 관계를 오래 버티게 하는 힘은 큰 사랑의 말이 아니라 작은 약속을 반복해서 지키는 태도라는 사실이다. 이런 태도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 약속은 설명이나 변명의 대상이 아니라 지켜야 할 기준에 가깝다.

 

신뢰는 선언이 아니라 반복이다

 

신뢰는 대단한 선언으로 쌓이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사소한 약속들이 조용히 지켜질 때 만들어진다. 그래서 나는 약속을 잘하는 사람보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애초에 하지 않는 사람을 더 신뢰한다. 그리고 그 일관성은 말보다 행동에서 더 분명히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이제 쉽게 말하지 않는다. 나는밥 한 끼 먹자.”라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하지 않는다. 정말로 볼 의사가 있을 때만 말한다. 그리고 말을 했다면 가능한 한 행동으로 옮긴다.

 

약속은 호의가 아니다. 상대를 존중한다는 태도다. 아무 의미 없이 던진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기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잊는다. 불필요한 관용어를 줄이고,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 그것이 관계를 덜 피곤하게 만들고, 신뢰를 오래 남긴다.

 

밥 한 끼 먹자.”라는 말이 다시 약속의 무게를 되찾기를 바라면서.

 

 

EP. 13 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