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6. 25. 12:15ㆍ글로벌 기업에서 사내 변호사로 살아남기 위한 고군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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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기업에서 사내변호사로 살아남기 위한 고군분투기
EP 4 : 영어가 여전히 숙제인 한국 토종 변호사가 외국계 기업에서 살아남기까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100% 토종 한국인인 필자는 미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면서, 마음 한편에 영어에 대한 막연한 자신감이 생겼었다. 그러나 막상 부딪혀 본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 미국 변호사의 영어 굴욕 흑역사 (1) - 입사 인터뷰
먼저 처음 구직 활동을 했을 때 이야기이다. 외국계 기업에서 일해 보고 싶었지만, 취업시장의 문턱은 꽤 높았기에 처음에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무작정 많은 회사에 이력서를 보냈었다. 운 좋게도 몇몇 국내외 기업에서 면접 기회를 얻었고, 대부분 영어 면접이 포함돼 있었는데 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한 국내 해운 회사의 영어 면접이었다.

면접 질문이 국제 조약과 관련된 해상 조건에 대한 것이었는데,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여서 당황한 필자는 횡설수설하며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그러자 연륜 있어 보이는 한국인 임원분이 “아니, 미국 변호사가 영어로 못해서 어떻게 합니까?”라고 말씀하셨다. 순간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리고 이 굴욕적인 면접 이후, 필자의 마음속에 있던 영어에 대한 막연한 자신감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뒤에 보게 된 외국계 기업 면접에서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싱가포르 매니저와의 화상 영어 인터뷰는 의외로 편하게 느껴졌다. 이땐 내 영어가 나쁘지 않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면접이라 긴장은 했지만, 분위기도 좋았고 대화도 꽤 잘 통했다. 결국 그 회사에 합격했으며, 이 경험을 통해 영어에 대해 크게 세 가지를 깨달았다.
1. 한국인끼리 영어 쓰는 건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2. 한국인의 영어 기준은 높다.
3. 영어보다 중요한 건 ‘내용’이다.
국내 해운 회사 면접에서 한국인들과 영어로 대화한다는 것이 쑥스럽게 느껴져 자신감 있게 말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다. 또, 수준 높은 표현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말을 아끼게 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이 면접의 실패 요인은 단순히 영어 실력 부족만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그 분야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사전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외국계 기업 면접에서는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하는 것이 오히려 더 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앞선 면접의 실패를 교훈 삼아, 이후 면접에서는 예상 질문 등을 미리 준비하며 철저히 준비했다. 그 덕분에 좀 더 자신감 있게 임할 수 있었고, 결국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 미국 변호사의 영어 굴욕 흑역사 (2) - 입사 후 벌어진 사건
이렇게 필자는 바람대로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게 되었고, 첫 상사는 싱가포르 남자 매니저였다. 처음에는 싱가포르 억양이 익숙하지 않아 알아듣기 힘들기도 했지만, 상사가 워낙 배려심 깊고 젠틀한 편이라 상대가 자신의 이야기를 잘 이해했는지 확인해 주고, 회의 내용을 이메일로 정리해 줘서 적응이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외국인과의 협업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하지만 다음으로 이직한 곳에서는 정반대의 경험을 하게 된다. 새로운 상사는 아일랜드 출신의 여성 매니저였고 나와는 정말 맞지 않았다. 일단 대면하지 않고 전화로만 소통하다 보니, 상대의 영어를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웠다. 이전 상사와는 달리, 내가 이해했는지 확인하거나 회의 내용을 정리해 주는 등의 배려가 없었던 새로운 상사는 일단 말을 너무 빠르게 했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아이리시 특유의 억양은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몇 번이나 상사의 지시 사항을 잘못 이해해서 업무 실수가 생기기도 했고, 그로 인해 더 위축되었다. 더욱이 내가 못 알아듣는 것 같을 때마다 그녀의 반응에서 묘한 무시가 느껴지기도 했다.
이 경험은 내게 또 다른 영어 관련 치욕으로 남아 있다. 처음에는 좌절감에 빠졌고, 외국인인 나를 배려하지 않는 상사가 나쁘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회사에서 만난 나의 상사는 나의 영어 선생님도 아니었고,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사실 그 상사도 바쁜 와중에 자신의 이야기를 잘 못 알아듣는 나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래서 일단 감정을 추스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 보기 시작했다. 먼저 상사와 통화를 할 땐 녹음을 했고 이걸 다시 들으며 내가 놓친 부분을 체크했다. 그리고 잘 못 알아들었을 때는 대충 알아들은 척 넘기지 않고 상대에게 내가 이해한 부분을 다시 말하며 이게 맞는지 확인했다. 잘못 알아들었다면 미안하지만 다시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3개월쯤 지나자, 이제 슬슬 그녀의 영어 억양과 속도에 익숙해졌고 조금씩 대화도 편해졌다. 물론 여전히 그녀는 바쁜 업무에 시니컬했지만 농담도 하고 예전보다 조금은 친숙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 영어 굴욕담이 가르쳐 준 나만의 영어 철학
이렇게 좌충우돌 시작된 한국 토종인의 외국계 기업에서의 삶이 어느덧 10년을 넘어섰다. 그동안 영어와 관련된 참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고, 여전히 영어는 나에게 숙제로 남아 있지만,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영어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영어는 발음보다 내용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자신감이다.”
외국인들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내가 네이티브가 아니라 이렇게 힘든 거구나 싶어 발음에 많은 신경을 썼던 것 같다. 내 발음이 안 좋아서 상대가 내 말을 못 알아듣나 싶어 괴로웠고, 노력했지만 이쯤이면 완벽해졌어야 할 나의 영어는 아쉽게도 네이티브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필자가 경험한 홍콩 영어, 싱가포르 영어, 아일랜드(영국) 영어, 미국 영어, 유럽 영어, 인도 영어, 일본 영어 등은 다 똑같은 영어가 아니었다. 각기 다른 억양, 속도, 발음, 단어 선택 등 각자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영어 중에서도 비교적 알아듣기 쉬운 영어는, 다름 아닌 내가 내용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쓰는 영어였다. 익숙한 미국 영어라도 모르는 주제면 잘 들리지 않았고, 반대로 인도 영어라도 내가 아는 이야기라면 비교적 잘 들렸다. 이 경험을 통해 영어로 소통하는 데 있어 발음보다 내용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래서 업무에서 영어를 사용할 때는 발음에 너무 신경을 쓰기보다, 말할 내용을 잘 준비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건지 명확히 정리하여 간결하게 말하는 것이, 비즈니스 이디엄(idiom, 관용구)을 사용하며 멋지고 세련된 영어 표현을 쓰려는 노력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느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감과 기세이다. 흔히 한국식 억양이 드러나는 것을 부끄러워하다 보니 자신 있게 영어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의 필자 역시 발음에 신경 쓰며 해야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인으로서 한국식 억양이 있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기에 한국식 억양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자신 있게 당당하게 영어를 사용하다 보니 어느 날 외국인 동료에게 영어 공부 어떻게 했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영어 공부를 하고 있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 분명하지만, 이 한 가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네이티브가 아니어도 영어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영어를 완벽히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영어로 살아남는 법은 있다. 그것은 결국 ‘부딪히는 것’이다.
Ep 5.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