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보다 오피스 :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 Ep 4. 귀동냥으로 업계 사투리 주워 담기 by 이현욱

2024. 10. 9. 12:05법정보다 오피스: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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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보다 오피스 :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 Ep 4. 귀동냥으로 업계 사투리 주워 담기

 

저의 두 번째 회사는 건설사였습니다. 건설사에서의 첫 회의는 아파트 하자 소송과 관련된 회의로 그다지 부담되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입사하기 전에는 신도시를 개발하는 공기업에서 근무하기도 했고, 관련 법적 지식과 소송 절차에 대한 이해는 충분하다고 자신했습니다.

 

회의는 감정서를 검토하는 자리였습니다. 소송 절차 중 감정은 법률가들이 알기 어려운 내용에 대하여, 관련 분야의 전문가로부터 객관적인 의견을 받는 절차입니다. 감정인으로부터 감정서를 받으면, 소송 당사자는 감정서에 불리한 내용은 없는지 기재 내용을 확인하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절차를 위한, 매우 실무적인 성격의 회의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감정 결과가 왜 이렇게 차이가 나죠?"

"글쎄요...."

감정서를 뚫어지게 보던 실무자가 말했습니다.

"! 이게 루베가 아니라 헤베로 계산했네요!"

"그래요? 그럼 루베로 다시 계산해 보죠."

그렇게 회의가 끝났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다지 부담되는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첫 회의부터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새로운 회사에서 받은 다이어리의 첫 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헤베? 회베? 루베?". 저는 아무렇지 않은 척 회의실을 빠져나와 미친 듯이 검색을 시작했죠. 다행히 검색을 통해 손쉽게 용어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고마워요. 나무위키).  

 

 

 

나무위키의 '현장 용어' 항목에는 이렇게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현장에 처음 가는 사람은 이 문제 때문에 상당히 머리가 아프다. 현장 용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친숙한 오함마, 공구리, 빠루 같은 용어는 현장 용어의 극히 일부이며 실제로는 몇 십 개 ~ 몇 백 개의 현장 용어의 뜻을 다 알아듣고 말할 줄 알아야만 한다. 때문에 건설 현장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막노동판 노가다를 뛰기 전 현장에서 쓰이는 현장 용어를 외우고 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 밑에는 고대하던 헤베루베에 대하여 이렇게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헤베: 평방미터(m²)"

"루베: 입방미터(m³). 보통 콘크리트 부피 표현에 쓰인다. 레미콘 믹서 트럭 한 대에 들어가는 콘크리트가 10루베 정도라는 식."

 

알고 보니 정말 단순한 이야기였습니다. 결론은 감정서에 단위를 잘못 계산한 오류가 있다는 것이었죠.

 

변호사가 회사 생활에 적응하는 것은 제네럴리스트에서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법원에서 다양하고 많은 사건을 다루던 때와는 달리, 회사에서는 특정 산업의 전문 지식을 요구하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특히 첫 번째 난관은 바로 이 새로운 용어와 개념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업계에는 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용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사내 고객들은 그들만의 업계 사투리를 사용합니다. 저는 그날의 회의를 계기로 '귀동냥'이라는 이름의 노트를 만들어, 업계 사투리를 만날 때마다 귀동냥 노트에 기재하고 관련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노션 프로그램을 통해 정리해 둔 귀동냥 노트

 

 

귀동냥 노트를 작성하고 관리하는 일은 생각보다 번거로웠습니다. 글을 읽다가 모르는 용어를 발견하면 다행이었죠. 인터넷으로 쉽게 찾을 수 있으니까요. 문제는 회의 중에 스쳐 지나가듯 나오는 용어들이었습니다. 소리만 듣고 업계 사투리의 정확한 뜻을 알아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리저리 찾아보다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실무자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변호사로서 '이것도 모른다'는 소리를 들을까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다 보니 그런 부끄러움은 사라지더군요. 오히려 인터넷을 이용해서 찾을 때보다 좋은 점이 많았습니다. 실무자에게 직접 물어보면서 업계 사투리가 사용되는 생생한 현장을 느낄 수 있거든요.

 

그리고, 귀동냥 노트를 작성하는 습관을 들이면 업계 사투리를 어렴풋이 아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됩니다. 정확한 뜻과 용례를 확인해야 노트에 적을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실무자에게 직접 물어보면서 관련 용어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업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녹아들려는 노력 그 자체에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귀동냥 노트를 작성하는 과정은 제가 사업을 이해하고 실무자들과 어울리고 그렇게 적응하면서, 조직의 일원이 되어가는 과정이었거든요.

 

노력의 효과는 의외의 곳에서 나타났습니다. 바로 이직 인터뷰에서였습니다. 건설사에서 순조롭게 적응을 하던, 헤드헌터를 통해 광고 회사에서 이직 제안을 받았습니다. 계속해서 건설 관련 회사에서 근무했기에 언젠가는 전혀 다른 산업 분야에서 경험을 쌓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이른 시기에 기회가 온 것이었습니다. 밑져야 본전인 셈 치고 헤드헌터에게 이력서를 보내주었습니다. 결국, 인터뷰 일정을 잡았고, 이직 인터뷰에서는 당연하게도 관련 업종의 경력이 없다는 점과 이를 어떻게 극복할 계획인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귀동냥 노트를 작성하면서 직전 회사에서 적응했던 과정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광고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회사에 입사한 지 벌써 1년이 넘었네요. 요즘에는 광고 업계의 사투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경쟁 PT’, '피치 프레젠테이션', ‘ATL’, ‘BTL’, ‘OOH’, ‘매체’, ‘랩사’, ‘디지털 사이니지’, ‘AE’, ‘CD’.... 벌써 많은 용어들이 귀동냥 노트에 들어왔습니다.

 

귀동냥 노트는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고 성장하는 데 있어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새로운 용어를 익히고, 실무자들과 소통하며, 사업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과정은 결국 제 커리어를 풍부하게 해주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학습과 노력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전문가가 되고, 변화하는 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귀동냥 노트의 경험을 통해 얻은 가장 큰 교훈은 바로 적응을 위해서는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낯설고 어려운 용어와 개념을 접할 때마다, 그것을 이해하고 적응하려 했던 몸부림은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을 넘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힘을 길러 주었습니다. 그렇게 쌓은 적응력은 새로운 환경에서 빠르게 자리를 잡고, 팀의 일원으로서 기여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귀동냥 노트는 그 과정에서 중요한 도구였고, 앞으로도 제 커리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참고 : 현장용어 나무위키 ☞ 보러가기

 

Ep 5.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