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보다 오피스 :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 Ep 6. 너는 이미 빠져 있다, 책상 위에서 시작되는 소확행 by 이현욱

2024. 12. 24. 11:58법정보다 오피스: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변호사들의 진짜 세상사는 이야기 '변호사 커뮤니티'  '로글로그' 입니다.

법정보다 오피스 : 인하우스 변호사의 커피챗 

- Ep 6. 너는 이미 빠져 있다, 책상 위에서 시작되는 소확행

 

 

변호사가 되고 처음 개인 방을 받았을 때가 떠오릅니다. 변호사라는 직업의 특권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 방은 업무 공간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마치 작은 왕국과도 같았습니다. 문을 닫고 들어서면 그곳은 더 이상 사무실이 아닌 '내가 만든 세상'이 되는 느낌이었죠. 책상 위에는 맑고 투명한 아크릴에 검정색 글씨가 새겨진 명패가 놓여있었고, 책장에는 그럴듯해 보이는 법률 서적들이 꽂혀 있었습니다. 바쁘게 읽던 소송 기록들이 방 여기저기에 쌓여 있었죠. 혼란함 속의 안정감, 그곳이 저의 왕국이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다녔기에 사무실 한편 옷장에 정장을 두고 다녔는데요. 출퇴근길에 세탁소에 맡긴 정장을 사무실 옷장에 걸어 두곤 매일 아침 입을 정장을 고르곤 했습니다. 정신없이 바쁜 날에는 사무 직원분께 부탁하여 참치 김밥과 컵라면을 사놓곤, 소송 기록 사이에 숨어 참치 김밥과 컵라면을 먹으며 일하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아무튼, 개인 방은 일상과 업무, 긴장과 휴식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나만의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내 변호사로 이직하면서, 그 개인 방은 작은 파티션 속의 책상으로 바뀌었습니다. 개인 방의 고요함과 달리 이곳은 소음이 가득한 공간이었습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동료들의 대화나 업무 회의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들렸습니다. 처음엔 집중하기 어렵더군요.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소음이 조금씩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대화의 잡음처럼 느껴졌던 소리가, 어느 순간에는 옆자리 동료의 프로젝트 성공담, 혹은 팀원들이 서로 건네는 격려의 말로 들려왔습니다. 어느새 이 소음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로펌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기까지 했습니다(Ep1. 참고).

 

이때 느꼈던 소음에 대한 변화가 개인 공간에서 공유 공간으로의 이동에 관한 것이었다면, 말 그대로 물리적 공간의 축소 자체도 큰 변화로 다가왔습니다. 개인 방에서 가져온 짐을 파티션 책상에 옮겨 놓으면서, 내 짐이 이렇게 많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난감했던 건 액자였습니다. 영국 여행에서 사 온 테오 반 리셀베르그<해안 풍경>이라는 그림의 액자였는데, 그다지 비싼 것은 아니고 그저 평범한 아트 포스터에 액자를 씌운 것이었습니다.

 

 

 

이 액자가 방에 걸어 두기에는 괜찮은 크기였는데, 파티션에 걸기엔 애매한 크기였습니다. 이 정도면 사실 집에 다시 가져다 놓는 게 맞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굳이 파티션에 걸어 두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이전의 나를 잃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공간에서 ''라는 존재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뭔가 남겨두고 싶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고집스럽게 그 액자를 걸었죠. 큰 사무용 집게를 파티션 가운데에 고정하고, 거기에 줄을 매달아 액자를 걸었습니다. 어색하고 삐뚤빼뚤하게 걸렸지만, 그걸 보고 있자니 묘하게 안심이 되더군요. 나를 다시 이 공간에 정착시켜 주는 작은 의식 같았달까요.

 

동료들은 파티션에 걸린 그 액자를 보며 "이게 대체 뭐예요?"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 애매한 크기를 묻는 것인지, 그림의 종류를 묻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 “변호사님, 미술에 관심 많으신가 봐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미술 애호가인 양 행세했습니다. 작가의 이름과 작품의 이름도 그때 검색해서 외운 것입니다. 사실 그림을 사 올 때 지갑 사정도 좋지 않았고, 그냥 적당한 크기에 세일 중인 그림을 골랐던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림에 대단한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재미있었습니다. 그 그림 덕분에 동료들과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조금씩 나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파티션에 걸린 그 삐뚤빼뚤한 액자 외에도 책상 위에 소품들이 하나둘 늘어났습니다. 그렇게 파티션 속의 작은 공간이 점차 나만의 세계로 바뀌어 갔습니다. 책상 꾸미기는 개인 방에서는 누리지 못했던 작은 성취감까지도 생깁니다. 드넓은 공간을 꾸미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난도가 높거든요. 저는 책상 한편에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소품을 두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 작은 물건들이 제 취향을 드러내면서, 때로는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주니까요. 그렇게 작은 소품이 발산하는 신호가 누군가와 공명하기라도 한다면, 고요했던 개인 방에서의 고독과 달리, 동료들과 웃으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생깁니다. 작은 물건 하나를 두고도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지요. 이것이야말로 개인 방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었습니다. 이렇게 작은 물건들로 채워진 책상은 이제 단순한 업무 공간이 아니라, 나를 표현하는 캔버스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거창한 건 없지만, 내친김에 지금 제 책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녀석들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노트북 위에 붙인 스티커입니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업무용 노트북은 어디까지나 회사 자산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다룰 수는 없지만, 어쩐지 조금은 내 것처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 시작은 아이들이 스티커를 제 노트북에 붙이면서부터였습니다.

 

< 맨 처음 붙인 스티커는 백설공주의 사과를든 마녀, 찾아보시라! >

 

저희 아이들은 예쁜 스티커를 보물처럼 모으는데요. 개중에 마음에 들지 않은 스티커를 선심 쓰듯 아빠에게 주곤 합니다. 예를 들면 디즈니 백설공주 시리즈 스티커에 함께 들어있던 마녀 스티커 같은 것 말입니다. 이 스티커는 아직도 노트북 뚜껑 한편에 잘 붙어있습니다. 그렇게 몇 개를 붙이다 보니 재미가 생겨서 이제는 틈만 나면 각종 스티커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트북노트북을 들고 회의를 할 때면 십중팔구는 회의 끝에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아니 무슨 스티커가 그렇게 많이 붙어있어요?”, 그럴 때면 제 답변도 저의 정해져 있습니다. “좋아하는 게 많거든요. 어떤 게 눈에 띄셨어요?”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어가곤 합니다. 단순한 스티커 몇 장이지만, 그걸 통해 회사의 무미건조한 노트북이 나만의 색깔을 가진 하나의 작품처럼 변해 가는 과정을 즐길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책상 위에 꼭 놓여 있어야 하는 탁상시계입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시간 약속이기에, 자연스럽게 탁상시계를 사용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받은 평범한 시계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 시계의 '째깍째깍' 소리가 참 거슬리더군요. 그래서 한번은 시계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방문한 이케아의 '클로키스'라는 시계였는데요. 온도 표시와 LED 조명으로 일상의 작은 즐거움을 주었지만, 하필 3분 라면 타이머가 필요했던 동료의 눈에 띄어 그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지금 제 책상 위에 있는 시계는 닌텐도에서 나온 '게임 앤 워치(슈퍼 마리오 ver.)'입니다.

 

< 시계 속 마리오가 계속 움직이는 모습을보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

 

이 시계를 고른 이유는 저의 추억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처음으로 사준 게임기가 바로 닌텐도의 패밀리컴퓨터입니다. 이 시계는 패밀리컴퓨터를 오마주해서 만든 것이거든요. 시계 화면에서 마리오가 계속해서 움직이는 모습이 나오는데,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그걸 쳐다보며 추억에 잠기죠. 정말 힐링이 됩니다.

 

재미있는 건 이 시계가 저뿐만이 아니라 동료들까지도 추억에 빠뜨린다는 점입니다. 자문을 위해 제 책상을 찾는 동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스몰 토킹의 최강자에요. 많은 이들이 질문을 하러 왔다가, 그만 ", 이게 뭐예요?"라고 묻습니다. 함정에 빠진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질의응답 대신 마리오와 게임에 대한 추억을 나누며 대화를 시작합니다. 스몰 토킹의 하이라이트는 저희 어머니가 제가 집에 와서 숙제는 안 하고 게임만 한다며 패밀리컴퓨터에 연결된 전기선을 모두 잘라버렸던 장면입니다. 이렇게 일상 속 작은 소품이 대화의 문을 열어주고, 일터에서의 관계를 조금씩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책상 위를 장식하는 한 가지는 레고로 만든 꽃입니다. 사실 저는 식물 키우기에 여러 번 도전했지만, 어째선지 식물들이 제 손을 거치면 하나둘씩 죽어버렸습니다. 그야말로 '식물 킬러'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이직을 축하하며 받은 작은 화분도, 더 이상 희생양을 만들 수는 없다는 생각에 회사 동료에게 남겨두고 왔습니다(, 시계를 가져간 그 친구요). 하지만 책상 위에 작은 식물이 놓여있을 때의 기분은 좋았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레고사의 식물 시리즈였습니다. 작은 브릭들이 모여 생생한 꽃잎을 만들어내는 모습은 볼 때마다 마치 진짜 식물을 보는 것처럼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 생경한 모습이 주는 신비로움은 덤이지요. 작은 조각들이 모여 만들어진 꽃 한 송이는, 마치 일상 속에서 작은 행복을 발견해가는 저 자신과도 닮아 있다는 생각까지도 듭니다. 물론, 누군가 제 책상 위의레고 꽃에 대해 묻는다면, 늘 시작은 똑같습니다. “저는 식물 킬러로서....”

 

이 작은 책상 위의 소품들이 가르쳐 준 건, 행복은 거창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업무와 바쁜 일상 속에서도 이 소소한 물건들이 저와 주변 사람들을 미소 짓게 합니다. 노트북 위에 붙은 스티커는 아이들과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하나하나 쌓아 올려 완성한 작은 레고 꽃은 저의 하루하루를 조금씩 쌓아가며 만들어가는 삶과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시계 속 움직이는 마리오는 어린 시절의 즐거움을 다시 불러일으켜 주죠. 그들은 매일 같은 자리에서 저와 동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려고 준비 중입니다. 그들은 저와 동료들을 이어주고, 과거와 현재의 추억을 연결해, 일터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나만의 작은 무대를 만들어줍니다.

 

손 닿는 곳, 여기저기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을 놓아두세요. 바쁜 업무와 일상 속에서 그들을 만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게 되니까요.

 

 

Ep 7.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