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출신 외국 변호사의 한국 적응기 Ep 8. 폭싹 속았수다, 그래도 잘 살고 있수다 : 결혼 7개월 차 보고서 by 권현진

2025. 6. 18. 19:57캐나다 출신 외국변호사의 한국적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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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출신 외국 변호사의 한국 적응기 

- Ep 8. 폭싹 속았수다, 그래도 잘 살고 있수다 : 결혼 7개월 차 보고서

 

 

결혼 전, 울 남편은 참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이었다. 약속 장소엔 늘 먼저 나와 기다려주고, 내가 좋아할 만한 메뉴를 미리 찾아놓고, 길을 걸을 때면 차에 치일까 봐 항상 안쪽으로 나를 밀어주던 사람. 그 모습에이 남자라면 평생 함께해도 좋겠다.’ 싶었다.

 

그리고 지금, 결혼 7개월 차. 요즘 우리 부부가 함께 보는 드라마 제목이 바로 <폭싹 속았수다>. 제주도 사투리로고생했지만 잘 살았다.”는 뜻이라지만, 가끔은 속마음으로 이렇게 외친다.

"...? ... 살짝 속은 거 아니야...?"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

 

현실 관찰 보고서: 예상과 다름, 다름 속의 재미

 

남편은 사람을 좋아한다. 좋은 친구도 많고, 사교성, 사회성, 인간성 모두 빛나는 모습에 반해 그를 선택했다. 회식이면 무조건 참석하고, 친구 모임도 빽빽한 스케줄 틈새를 비집고 꼭 챙긴다. 가끔은 "오늘 좀 늦어."라며 귀가가 야무지게 밀리기도 하고, 술에 절어 들어와 내 잔소리 폭격을 맞기도 한다.

 

결혼 전, 엄마가 하셨던 말씀. “술 궁합 중요하다.” 그 말이 요즘 들어 부쩍 떠오른다. 나는 체질 상 술을 잘 못 마시고, 오빠는 체질 상 술이 참 잘 들어간다. 결혼 전엔 어찌저찌 와인 한 잔, 맥주 한 잔이라도 함께했지만, 요즘은 아예 몸이 술을 거부한다.

 

결혼 전, 남편이 한 말 중에서 가장 공감 갔던 말은나는 사람 많은 데서 에너지 소모돼.”였다. ‘, 나랑 비슷하네?’ 싶었다.

그런데 결혼 후 알게 된 남편은 의외로 모임과 약속이 많은, 꽤 바쁜 사람이었다. 처음엔 당황스럽고 솔직히 서운했다. ‘왜 나랑 보내는 시간은 줄고, 다른 사람들과의 시간은 늘어나지?’ 속으로는속았구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사람은 원래 사람을 좋아하고 어울리는 걸 즐기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나도 안다. 한국 사회에서 회식은 단순한 술자리가 아니라일의 연장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술 한잔 기울이며 사회생활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걸.

 

그걸 이해하고 나니, 술 냄새 풍기며 들어오는 남편을 보면 한숨 대신 이렇게 중얼거리게 됐다. “오늘도 사회생활 열심히 하고 왔네.”

 

그러나 남편과 함께 시간을 더 보내고 싶기에, 최근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대화를 나눴고, 주 최대 2회 약속, 11시 이전까지는 귀가하기로 합의했다. 결국 부부란, 끊임없는 대화와 조율, 그리고 서로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사이인 것 같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하나의 가족을 꾸리는 과정

 

지금까지는 흉 아닌 흉을 보았으니 남편 자랑을 해보자면, 결혼 준비 과정이나, 결혼 후 생활에서 남편과 의견을 조율할 일이 굉장히 많다. 이 과정에서 우리 남편은 보통 내 의견에 따라 주는 편이다.

 

새로 이사한 집 인테리어를 할 때도, "예쁘다~ 네가 좋은 대로 해. 현진이가 원하는 게 내가 원하는 거야." 늘 이렇게 따뜻하게 말해준다. 가구, 색상, 배치까지, “네가 좋으면 해~” 1순위. 아주 유연한 수용형 남편 스타일이다. (물론, 예산 조정과 디테일 조율은 내 몫이다.)

 

그래서 가끔은 헷갈리기도 한다. '이게 배려인가, 무관심인가?' 하지만 곧 깨닫는다. 남편도 은근히 고집 센 사람인데, 내 앞에서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는 걸.

 

결혼은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을 맞춰가는 여정임을 실감한다. 결혼 생활은 하나의 협상 게임이자 공동 프로젝트 같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일. 그게 결혼이고, 또 사랑일지도 모른다.

 

오빠 친구가 말했다던가. "결혼하면 평생 같이 살 사람은 네 아내다. 무조건 아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그 친구, 초대해서 고기라도 한 판 거하게 사주고 싶다. (내 요리 실력으로는 대접하기엔 아직 무리니까.)

 

 

그래도, 행복이 더 크다

한국에서의 삶은 참 역동적이다. 빠르게 돌아가는 사회 분위기, 빽빽한 스케줄, 거기에 더해 당연히 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아서 가끔은 캐나다에서의 느긋하고 유연한 일상이 그립다.

 

눈 덮인 주말 아침, 라떼 한 잔과 책 한 권, 퇴근길 호숫가 산책, 약속 없는 저녁.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시간과 공간을 온전히 채웠던 그때의 일상들. 문득, 그 고요하고 단단했던 시간이 그리워진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 조용함이 지금만큼 웃음 많은 날들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요즘은 남편의 우주(가족, 친구, 회사, 그 모든 것)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캐나다에서의 생활은 고요했다. 퇴근하면 집은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었고, 조용히 TV를 보거나 책을 읽으며 하루를 정리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의 리듬이 남편과 닿아 있다. 그의 일정에 따라 주말 계획이 달라지고, 그의 회식 스케줄에 따라 저녁 식탁의 풍경도 달라진다.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이 줄어든 것 같아 아쉽기도 하지만, 식탁 위에 놓인 남편이 사 온 간식이나 소소한 선물을 보며, ‘이 사람, 나를 생각했구나.’ 싶을 때면 가슴 한편이 따뜻해진다.

 

그렇게 삶에 물든 작은 흔적들이, 어느새 나의 일상이 되고, 나를 웃게 만드는 순간이 된다.

 

캐나다의 조용한 아침엔 눈 내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요즘의 아침은여보,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라는 말로 시작된다. 남편이 두고 간 텀블러, 널브러진 와이셔츠, 퇴근 후 문 열리는 소리. 그 모든 작은 흔적들이 집 안에 남겨진그 사람의 존재같아서, 가끔은 신기하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다.

 

예전 같았으면 번거롭다고 느꼈을 일들, 이를테면 갑작스러운 가족 모임이나 친구들과의 약속에 동행하는 일마저도, 이제는이 사람의 세계를 함께 살아가는 일이라 생각하게 됐다.

 

그렇게 남편의 우주 속에서 나의 하루가 스며드는 요즘, 가장 많이 웃는 순간은 단연 남편과 함께 있을 때다.

 

서로의 퇴근 후 짧디짧은 틈 사이에서 오늘 별일 없었어?” 하며 안부를 묻고, 함께 밥을 먹고, 한강변에서 자전거도 타고, TV를 잠깐이라도 나란히 보며, 꼭 껴안고 잠드는 아주 평범한 일상.

 

그러다 시간이 맞으면,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푸켓 카타 비치의 좁은 골목에서 예상치 못한 들개들과 눈치 싸움을 하고, 제주도의 벚꽃 흩날리는 길을 달리며 창밖을 바라보고, 가파도 유채꽃밭 옆을 자전거로 천천히 지나고, 경주 첨성대 앞 해바라기밭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즉흥적으로 떠난 한탄강 온천 여행에서 느낀 여유와 잔잔한 행복까지.

 

활동적이고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 덕분에, 국내외 예쁜 곳들을 참 많이 다녔다. 특히 최근 다녀온 일본 우레시노는 조용하고 한적한 일본 시골 마을이었는데, 남편과 산 뷰를 바라보며 온천을 즐기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며 ', 이런 게 행복이구나.' 싶었다.

 

지난 주말 통영 외도로 놀러 갔을 때, 오빠에게 말했다.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외도 보타니아 가든에서 남편이랑 아이스크림 사 먹는 거였어.” 오빠는 피식 웃으며 나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고, 나는 괜히 진지하게 덧붙였다.

 

외도라는 섬이, 원래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였는데, 두 부부가 들어가서 정원으로 가꾼 거래.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자같이, 천천히, 예쁘게.”

 

아주 사소하지만, 내 인생 버킷리스트 하나가 체크되는 순간이었다.

 

외도 보타니아처럼, 우리도 천천히 가꿔가기로.

 

 

그렇게 흘러가는 찰나들이 모여 그래, 우리 참 잘 살고 있구나.’하는 확신을 준다.

 

신혼이 주는 소소한 즐거움

 

함께하는 신혼 생활은 매일 완벽하진 않지만, 뜻밖의 행복으로 가득하다.

 

간편한 주말 아침 — 케첩 하트로 시작하는 신혼의 하루

 

일본 구마모토 거리에서 먹은 천 원짜리 팥 붕어빵에도 둘이 동시에 감탄하고, "한강 갈까?" 하고 30분 뒤엔 돗자리 깔고 라면, 소떡소떡, 치킨을 까먹고 있는 우리. 이런 걸, 죽이 잘 맞는다고 하는 걸까.

 

서로 다른 습관에 놀라다가도, 어느새 익숙해진 나를 발견한다. 결혼은 결국, 매일 서로를 다시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일인 것 같다. 때로는 투덜거리다가도, ‘그래도 이 사람이랑은 또 하루가 기대된다.’ 싶은 것. 그게 우리가 함께 가는 방식이다.

 

폭싹 속았수다, 그래도 잘 살고 있수다

 

처음엔 "어쩌다 이렇게 됐지?" 싶었던 '폭싹 속았수다'라는 말이, 요즘은 "그래도 함께 웃으며 잘 살고 있구나."라는 다정한 독백이 되었다.

 

결혼은 완벽한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끌어안고도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과 살아가는 일임을, 나는 오늘도 조금씩 배우는 중이다. 그래서 지금 이 평화롭고 고요한 일상이, 참 감사하다.

 

 

EP. 9 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