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25. 10:48ㆍ캐나다 출신 외국변호사의 한국적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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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출신 외국 변호사의 한국 적응기
- Ep 4. 인연과 운명 이야기
인연이란 단순한 우연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때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와, 우리의 삶을 영원히 변화시킬 '운명'이 되기도 한다.
나는 캐나다에 살면서 매년 어머니와 함께 한국을 방문해, 한국에 계신 아버지, 호주에 있는 언니와 가족 시간을 보내곤 했다. 2022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가족과 제주도로 여행을 가기 위해 한국에 왔을 때, 아버지께서는 뜻밖의 제안을 하셨다. 한국에 있는 한 남성을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오랜 이혼 소송 업무로 지친 탓인지 사람에 대한 기대도 사라졌고, 결혼에 대해서는 더욱 회의적이었다. 설령 한국에서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결국 나는 캐나다로 돌아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일시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을 것을 알기에, 감정적으로 얽히고 싶지 않았다. 이미 캐나다에서의 삶이 자리 잡혀 있었고, 한국에 정착할 계획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저 잠깐의 만남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약속을 잡으셨고, 아버지의 친한 지인이 소개해 주신 분이니 최소한 식사라도 함께하라며 나가보라고 하셨다. 그렇게 나는 2022년 12월 23일, 그해 가장 추웠던 겨울날, 지금은 사라진 삼청동 근처의 한 파스타집에서 그와 첫 만남을 가졌다.
영하 16도의 혹한 속에서 길을 헤매다가 약속 시간에 10분이나 늦고 말았다. 안경은 서리가 끼고, 얼굴에는 전날 피부과 시술로 인한 흉터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인 모습으로 들어선 나를 보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의 말에 마지못해 나간 자리였기에 사실 나는 빨리 시간을 때우고 나오자고 마음먹고 있었다. 잠깐 얼굴만 보고 헤어질 사람에 대해서 기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나는 예상치 못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이한 그의 미소는 내 마음속의 얼음장을 녹이는 것 같았다. 그의 다정한 눈빛과 내 말에 귀 기울여 들어주는 모습은 내게 특별한 감정을 심어 주었다. 그의 세심한 배려와 진심 어린 관심이 나를 감동시켰고, 추운 겨울 속에서도 마음에 따뜻한 온기가 퍼져 나갔다.
그날 저녁, 우리는 LP판이 가득한 아늑한 와인바로 자리를 옮겼다. 걸어가는 내내 그는 마치 꽃게처럼 나만을 바라보며 눈을 맞추었다. 순간 너무 부끄러웠지만, 그의 눈빛이 좋았던 건지 나도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게 되었고,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마치 종소리처럼 느껴졌다. 와인바는 내 취향을 완벽히 저격한 듯한 곳이었고, 문득 그가 내가 찾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아쉽고 짧게 느껴졌다. 서로 다른 국적, 배경, 문화 속에서 자란 우리가 마치 오랜 친구처럼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결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내가 어느 순간, 만약 아들을 낳는다면 그와 같이 자라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내가 바라 왔던 매너와 예의를 갖춘 사람이었다. 가장 추운 날이었지만, 그는 내 마음을 가장 따뜻하게 해주었다.
12월 26일에 캐나다로 돌아가야 했지만, 나는 크리스마스 날 그와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아쉬움을 한가득 뒤로 한 채 캐나다로 돌아온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고, 그 인연은 다시 한국에서 이어졌다.
나는 타로점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와의 인연을 점쳤을 때 반복적으로 나온 세 가지 카드가 있었다. '연인(the lovers)'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는 것을, '지팡이 4번(four of wands)'는 ‘행복한 결혼’을, 그리고 '컵 10번(ten of cups)'은 무지개 아래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의미하는 ‘사랑의 완성’ 카드였다.
이제 그는 나의 운명이자 '오빠'가 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처음으로 오빠를 만났을 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너무 기뻐서 꼭 안아주고 싶었다. 나는 늘 다정한 배우자를 꿈꿔 왔는데, 오빠를 만나고 나서야 내가 바라던 다정함을 가진 사람이 내게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를 들면, 오빠 친구들 모임에 갔던 어느 추운 겨울날, 추위를 많이 타는 나를 위해 오빠는 망설임 없이 난로를 번쩍 들어, 내 뒤로 옮겨 주었고, 내가 종이에 손을 베었다고 말하자 곧바로 소독약을 꺼내어 정성껏 발라 주었다. 어디를 가든 내 손을 꼭 잡고 함께 걸어가며, 장거리 운전을 교대로 하면서도 간식을 내 입에 넣어 주고 "수고했어."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그의 다정함은 나를 늘 따뜻하게 만든다. 심지어 식당에서는 내 컵이 비지 않도록 음료를 채워 주는 세심함까지 잊지 않는다. 오빠가 보여준 이런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마음은 그가 내 운명임을 더욱 확신하게 했다. 그의 세심한 배려가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드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9월 21일 결혼을 한 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지금, 나는 한국에서 새로운 인생의 장을 열기 위해 그와 함께 출발선에 서 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닌, 둘이서 손을 꼭 잡고서.
이렇게 운명적으로 이어진 우리의 만남에도 난기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결혼 준비는 원래 신경 쓸 것이 많지만, 다른 문화권에서 자란 두 사람이 함께 준비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도전들이 더해지기 마련이다.
한국에서 결혼 준비를 하면서 우리는 문화 차이를 몸소 경험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결혼식이 사회적 이벤트로, 많은 지인과 가족을 초대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캐나다에서는 소박한 가족 중심의 예식을 선호한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초대 인원과 예식 형식에 대해 많은 논의가 필요했다.
이러한 도전들은 갈등의 씨앗이 될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서로의 문화를 배우고 존중하는 기회를 가졌다. 결국, 이 모든 경험들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고,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이 하나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우리는 한국과 캐나다, 두 나라의 결혼 문화 차이로 인해 서로 다른 기대와 관습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때때로 작은 갈등과 오해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 또한 우리의 인연이 더 깊어지고,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의 일부였다는 것을 이제는 깨닫는다.
우스갯소리로, 오빠 지인들이 오빠에게 결혼 준비 과정에서 커플들이 자주 싸우게 되는데 그때는 무조건 ‘미안하다’와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조언해 줬다고 한다. 반대로 말하면 안 되고, ‘미안하다’로 시작해서 ‘사랑한다’로 끝내면 결혼까지 순탄하게 갈 수 있다고 말이다. 문화적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보면 결혼 준비 과정에서 누구나 겪는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다행히, 오빠는 분쟁이 생기기도 전에 항상 먼저 미안하다고 해주고, 사랑한다고 말하며 나를 안아주었다.
우리는 우연히 만났지만, 그 인연을 운명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노력과 이해, 그리고 사랑임을 깨달았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은 우리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이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반쪽을 찾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최근에 본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단어 ‘인연’은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20년 후 재회하며 과거와 현재의 인연이 교차되는 모습은 인생의 선택과 운명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나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운명’을 믿지만, 그 운명이 되기 위한 필연적인 인연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청첩장에 담았던 피천득의 <인연> 속 한 구절이 떠오른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우리는 스쳐 지나갈 뻔했던 인연을 놓치지 않고 붙잡아 운명으로 바꾸었다. 한국에 오게 된 것, 그를 만나게 된 것, 현재의 직장과 좋은 동료들을 만난 것 모두가 인연이었고, 그 인연 덕분에 내 삶은 더욱 건강하고 행복해졌다. 무엇보다도, 나보다 더 나은 내 반쪽을 만나게 된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인 것 같다. 인연은 우연이 아닌,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는 운명임을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결혼 후 EP. 5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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