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P 변호사의 로펌에서 살아남기 - Ep 3. 선배 노릇도 쉽지 않다. by 주현영

2024. 6. 12. 10:43Intp변호사의 로펌에서 살아남기

변호사들의 진짜 세상사는 이야기 '로글로그' 입니다.

 

Intp변호사의 로펌에서 살아남기

- EP 3 : 선배 노릇도 쉽지 않다.

 

변호사는 늘 누군가에게 선택을 당해야 하는 자리다. 변호사 업무 자체가 내가 일을 찾아서 한다기보다는 뭔가 문제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가능성이 있을 때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글의 연재를 준비하고 시작할 때만 해도 다소 바쁘고 정신이 없었는데, EP3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는 약간의 여유가 생기면서, 불안감과 초조함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다(오래 변호사를 한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다 알 것이다). 늘 반복되는 기다림의 사이클이 시작되는 것도 같은데, 뭐 이러한 기다림도 내일 고객이 나를 찾는다면 바로 끝나겠지만 언제 고객이 나를 찾을지는 알 수 없다. . 선택을 당하여야 하는 삶이라니. 가끔 내가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삶을 상상해 보면, 와 상상만 해도 정말 끝내준다. 나도 인생의 언젠가 즈음에는 내가 일을 선택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꿈은 언젠가 이루어지니까희망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로펌 변호사의 일생에서 선택을 당하기 위한 노력은 연차와 속해 있는 팀의 상황 등에 따라 계속하여 바뀐다. 우선 저연차 시절에는 자신이 직접 고객에게 선택을 당하기보다는 팀 내에서 팀장 내지 선배 변호사에게 선택을 당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물론 성실하고 일 처리를 잘하고 매너가 좋으면 선택에 유리한 것은 당연하다. 연차가 쌓여 선배 변호사가 되고 나면 고객으로부터의 선택이 중요해지지만, 여전히 로펌의 다른 팀이나 팀 내 동료 변호사로부터의 선택도 중요하다. 물론 내가 고객을 선택할 수 있다면 베스트 오브 베스트이다. 마치 <눈물의 여왕>의 김수현 같은 배우가 여러 시나리오를 보고 나 이 작품 하고 싶어요.”라고 고르는 그런 상황 말이다. 그런데, 과연 인생을 그렇게 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소시민적인 나는 선택을 당하려고 하루하루 버둥거릴 뿐이다.

 

나도 경력이 쌓이면서 선배가 되다 보니 업무를 맡아 팀을 짤 때 후배를 선택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과정에서 옛날의 나를 회상하면서 아 내가 그때 왜 그랬지?’하며 후회하기도 하고, ‘아 나는 그때 안 그랬는데, 요즘 애들은 왜 이러는 거야?’하면서 속으로 후배에게 서운하기도 하고 그런다.

 

사실 나는 전형적인 로펌의 저연차 어쏘 변호사(로펌에 소속된 급여를 받는 변호사) 시절은 거치지 못하였다. 행정기관인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근무하다 로펌에 합류하다 보니 어느새 고연차 어쏘 변호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상당 기간 공무원으로 일했다 보니, 사건을 보는 관점과 흔히 쓰는 문장도 공무원 스타일이어서 처음에는 적응이 쉽지 않았다. 최초로 초안을 쓴 의견서는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마일리지 제도의 불이익한 변경에 관한 약관 검토>였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붉어지는데, 사실상 선배 변호사님이 그 의견서는 거의 다시 쓰신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한숨을 쉬시면서, ‘아직 공무원 티를 못 벗은 것 같다고 하셨던 선배 변호사님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그 이후 선배들이 수정해 주신 의견서를 다시 곱씹으면서 고민도 하고, 꾸준히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나름 적응을 해서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나도 어느새 선배가 되어 무수히 많은 후배들과 함께 했는데, 그중에는 나와 잘 맞는 후배도 있었고, 좀 별로이거나 솔직히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던 후배도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요즘 내가 같이 일하고 싶은 후배의 기준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첫째, 소통이 원활한 후배가 좋다. 어떠한 일을 하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통이다. 같은 한국말을 하고 있지만, 가끔은 상대방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고, 같이 이야기를 할 때는 이해한 것 같았는데 나중에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 매일매일 듀(due)가 급한 업무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런 경우는 정말 최악이다. 그리고 가끔은 너무 말이 없거나 의사 표현을 하지 않는 후배도 있는데, 아무리 일을 잘한다고 해도 같이 일하고 싶지 않은 유형이다.

 

선배, 후배, 동료 각자가 논의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어떠한 결론을 내는 것이 적정한지에 대하여 소통이 잘 되면 업무 처리가 당연히 효율적이다. 그러다 보니 누구나 자신과 소통이 잘 되는 사람과 일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냥 선배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아부를 하거나 무조건 선배의 말이 맞다고 맞장구를 치는 것과는 다르다. 여기는 비즈니스 영역이지 언니, 오빠, 동생을 하는 관계가 아니다. 잘못된 부분이 있거나, 자기가 생각하기에 적절한 대응 방안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바로바로 의견을 제시하고 방향을 수정해 나가야 한다. 선배라고 모든 것을 다 잘 알 수는 없고, 옳은 결정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업무라고 하여 너무 딱딱해서도 안 된다. 우리 모두 AI가 아닌 감정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고. 좋은 태도로 대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면 누군가 말할 것이다. 그런 너는 이런 것을 잘했냐. 사실 첫 EP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나는 낯가림이 심해서 선배에게 의견서 초안을 올리고 나서는 그 선배가 수정 의견을 보낼 때까지는 그 선배와 마주치는 것이 힘들어서 일부러 그 선배 방을 지나지 않기 위해 돌아서 다니고 그 선배와는 식사 자리도 가급적 피하는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없긴 한데, 그만큼 자신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내가 모르는 부분, 의심 가는 부분은 정확히 모른다고 메모를 달고 내 의견은 여기까지인데 자신이 없는 부분은 여기라고 솔직히 기재하고, 자신 없는 의견서 초안은 선배가 고민할 시간을 확보해 주기 위해 최대한 빨리 초안을 보내려고 노력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지금도 의견서를 못 쓰는 후배보다 고쳐야 할 부분이 많음에도 너무 늦게 줘서 수정 시간을 촉박하게 하는 후배, 의견서 내용 중 정확히 아는 부분과 모르는 부분, 자신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구분하여 주지 않는 후배가 더욱 싫은 것 같다.

 

둘째, 업무를 잘하는 후배가 좋다. 그런데 잘한다는 것의 기준은 뭘까? 변호사 업무라는 것은 사실 정답이 없다. 현실은 사법시험 답안지나 로스쿨 시험 답안지 같은 단순화된 사실관계가 아니라 복잡한 이해관계가 섞여 있고, 어떠한 경우에는 이미 방향이 정해져 있기도 하다. 단순히 법률적인 리스크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사업을 진행하지 못한다면, 그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가끔 시험지 모범 답안처럼 정리해 온 의견서나, 고객이 원하는 방향과 반대의 결론임에도 아무런 고민 없이 그냥 당신이 알아서 하라는 식의 단정적인 의견을 적어온 의견서를 보면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물론 고객이 원하는 방향이라고 하여, 아닌 것을 그렇다고 의견서를 작성하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 고객이 원하는 방향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으므로 그 방향이 최대한 가능하도록 같이 고민해 주고, 조금 더 리스크를 낮출 방안을 찾아 주는 것이 변호사의 업무이다. 정말 유수의 대학을 나오고, 좋은 스펙을 가진 변호사이면서도 이러한 점에 대한 고민이 없는 후배들을 보면 좀 답답하다. “, 이런 답 받으려고 우리한테 돈을 주겠니? 네가 돈을 주는 입장이라면 어떻겠니?”라는 이야기가 입에서 맴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사실 연륜이 쌓여야 하는 영역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이런 점을 보조해 주라고 선배가 존재하는 거니까, 이런 부분이 좀 부족한 점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가끔은 다른 일이 급해서 그런 것인지 기본적인 사실관계 내지 법리 파악도 하지 않고 작성한 것 같은 의견서가 있는데, 정말 이러한 경우에는 화를 참기가 쉽지 않다.

 

 

셋째, 업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즉각적이고 정확한 반응을 해 주는 후배가 좋다. 로펌의 업무는 팀을 이루어서 하는 일이 많고, 상당히 분업화되어 있는 형태이다. 그래서 컨베이어 벨트에서 어느 지점이 지연되면 그 업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 자신의 위치에서 끝없이 일을 수행해 나가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후배들이 알지 모르겠지만, 나도 오랫동안 일을 하다 보니, 의견서 내용만 봐도 그 후배가 연애를 시작하여 마음이 설레는지, 실연을 당해 마음이 아픈 것인지 알 때가 있다. 심리 상태 등에 따라서 같은 사람이라도 의견서의 퀄리티가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나도 지금까지 로펌 생활 동안 팀 내에서 구멍이 되지 않기 위하여, 나로 인하여 컨베이어 벨트가 멈춰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등바등 살았던 것 같다.

 

선배로서 의견서를 최종적으로 마무리하는 입장이 되고부터는 상대적으로 개인 시간은 많이 확보하였지만(후배들이 잘 하겠지 하면서 저녁 약속에 나가는 시간이 많아졌다.) 다음 날 나가야 할 의견서가 있을 때는 새벽에 중간중간 잠이 깨면서 핸드폰으로 이메일을 살짝살짝 열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실눈으로 이메일을 살짝 열어보고는 뭔가 충실한 느낌이면 아 다행이다. 역시 후배 선택을 잘했어, 나이스.”하고 흡족하게 다시 자고, 불길한 느낌으로 열어보고 이거 각이 안 나오는데, 내가 다 뜯어고쳐야 하나, 이거 몇 시간 수정각이지?”하면서 안절부절못하다가 안 일어나지는 몸을 억지로 세워서 사무실에 나가기도 한다. 이럴 때, 어떤 후배가 보낸 초안인지에 따라 열어 보기가 정말 망설여지는 후배가 있는가 하면 어떠한 경우에는 잘했겠지 하면서 여는데 주저함이 안 생기는 후배도 있다. 이 지점에서 내가 과거에 선배에게 둘 중 어떤 후배였는지 나는 모른다. 한 번도 선배에게 물어본 적이 없으니까. 물론 앞으로도 물어보지 않을 생각이며, 영원한 비밀로 남겨둘 것이다.    

 

지금까지 주제넘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후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 모두 내 초안을 선배가 여는데 주저함이 없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을 것이다. 나도 후배 시절에는 초안을 쓰는 자리만 벗어나면 좋을 줄 알았는데(한동안 내 프로필 문구가 초안을 쓰는 자가 가장 힘들다.’였는데, 이는 선배에 대한 나의 소심한 원망이 담긴 프로필 문구였다.), 선배가 되고 나니 초안을 기다리는 것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후배 시절에는 연차가 높아 선배가 되면 아는 게 많아지고 결론도 자신 있게 낼 줄 알았는데, 선배가 되고 나서도 여전히 모르고 결론을 내는 것은 늘 두렵다. 그리고 이제는 선배가 업무 지시를 정확히 안 해 준 것이 그들도 잘 모르고,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땅의 선배, 후배 모두, 다들 고생한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그저 고통스러울 뿐이다. 그러니 서로서로를 너무 미워하지도 멀리하지도 말자. 그러나, 나는 오늘도 괜히 사무실 복도를 지나다 열린 방문 사이로 보이는 책상에 앉아 있는 후배에게 말을 걸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내 방으로 들어오고, 화장실 갈 때에는 선배가 있는 방의 복도 말고 다른 곳으로 돌아서 걸었다. 그렇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그들을 응원한다. 나도, 너도, 우리도 다 잘 살아 보자고.”

 

 

Ep 4.에서 계속........